요즘에는 초등학교 1학년부터 휴대폰을 쥐여주곤 한다. 이해는 간다. 육아가 대가족 또는 골목 공동체로부터 분리되기 시작한 현대사회. 일터에서 벗어나기 힘든 부모들은 소통의 끈이라도 사서 목에 걸어줘야 마음이 놓인다. 하지만 그 끈은 복잡해진 사회 여기저기에서 엉키기 시작한다.
‘카톡 왕따’라는 말이 있다. 왜 아이들까지 카톡을 해야만 하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한국의 남녀노소 모두 그 속에 엉켜버렸다. 진정한 갑은 카톡을 쓰지 않는다는 말이 있던데, 관계의 굴레를 자신이 정의할 수 있는 이들이 아니면 어쩔 수 없이 설치해야 하는 국민 앱이라서인가 보다.
차라리 한 대 때렸다면 다시 맞받아치거나 바로 그 행태를 공론화할 수 있지만, 언어폭력의 ‘이지메’는 대개 ‘일 대 다’로 시끄럽지 않게 이루어지기에 그 대응이 좀처럼 쉽지 않다. 당하고 있음이 느껴질 때는 그 ‘병태(病態)’의 진행도 상당히 진척된 이후다. 가해자 측면에서도 리스크가 적으니 오히려 더 편하다. 타인을 때린다는 기분 나쁜 반동이 자기 신체에 전해지지도 않으니 수반하는 죄의식도 희석된다. 야만적으로 신체를 가동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타자를 제압할 수 있다고 여겨지니 이 길에 빠지게 된다.
실제 학교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초·중·고에서 신체폭력보다 사이버불링(괴롭힘)이 더 많아졌다고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역시 폭력으로 집계되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생활을 하는 어른들은 알 것이다. 비대면 커뮤니케이션이 얼마나 깊은 오해의 온상이 될 수 있는지. 메일로만 보내면 언제든지 내 의사와 상관없이 잘못 읽힐 수 있음을 알고 있기에, 결국은 전화기를 집어들곤 한다. 음성을 쓸 수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카톡을 해야 한다면 이모티콘이든 뭐든 어떻게든 표정을 전송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쓴다. 입꼬리도 떠올리게 만들기 위해 온갖 아이디어를 낸다.
‘네’와 ‘넵’의 차이는 그렇게 어른들의 사정을 담은 문화가 되며, ‘~’는 대화창마다 넘실댄다. 이런 안쓰러운 문화도 육성과 대면으로 상대의 안색을 살피는 일에 익숙해진 뒤에야 동원될 수 있는 묘기들이다. 그러나 여럿 앞에서 이야기하는 일의 경험보다 비대면의 단톡방에 먼저 내몰린 아이들은 트러블의 위험에 처해진다. 빠르게 올라가는 스크롤 속에 한마디 거든 것이 예기치 않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약아빠진 아이들은 일부러 덫을 놓기도 한다. 그렇게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고 낙인을 찍고, 린치를 위한 다른 단톡방에 계속 초대한다거나, 초대한 뒤 놓고 떠나버리거나 아예 무시하는 등 창의적인 괴롭힘을 펼쳐나가고 이 행위들에 ‘카따’니 ‘방폭’이니 ‘떼카’니 하는 신조어를 붙여 별것 아닌 것처럼 여긴다. 아직 자라지 않은 아이들이기에 누구나 가해자가 될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어른들은 실명으로 자기 자랑을 하고 가식적 덕담을 나누는 페이스북의 미화된 훈훈함에 익숙해진 채 밀실화·익명화되고 있는 청소년 소셜미디어(SNS)의 위험을 느끼고 있지 못하다. 아이들은 ‘페북 아재’들이 안 보이는 느슨한 공간을 찾아 주기적으로 이동하고, 어른들은 4차 산업혁명으로 그 공간을 열심히 만들고 또 돈을 벌고 있다. 스마트폰 속 인터넷은 권위를 획득한 기성세대의 고목들에게는 더 편안한 온실이 되어가고 있지만, 피어나는 새싹들에게는 사막이 되어 가고 있다.
<김국현 IT 칼럼니스트·에디토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