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3월 두 사람 첫 만남, 할머니 이야기 일본에서 책으로 펴내
드라마 <대장금>에는 억울하게 한상궁을 잃은 장금이가 유배지인 제주도에서 끊임없이 탈출하는 모습이 나온다. 잡혀 돌아갈 때마다 되뇌는 말은 “마마님, 보고 싶습니다”이다. 마지막회에서 최고상궁이 된 장금이는 수라간 비서(秘書)에 어머니와 한상궁의 이야기를 적는다. ‘어머니 보고 싶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기록 없이 권력으로 자신들을 정당화하려 했던 가해자 측은 스스로의 한계로 몰락한다.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이나 희움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등 ‘할머니’를 기억하는 공간에서 우리가 만난 할머니에 대해 얘기하는 자리가 마련될 때가 있다. 참석자들은 할머니의 다양한 얼굴을 떠올리고 ‘보고 싶다’는 마음에 빠진다. 우리의 최선은 할머니의 이야기를 거듭하고 기록으로 남겨 ‘진실’을 전하는 것뿐이다.
군사우편저금 되찾으려 일본 방문
2019년 10월 5일 30여년간 문옥주의 이야기를 전해온 모리카와 마치코가 갑자기 작고했다. 혈액암이었다. 안이정선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대표는 지난 9월에 만났을 때에도 병에 대한 내색이 전혀 없었다고 전했다. 당시 모리카와가 “내 나이가 벌써 (문옥주) 할머니가 돌아가신 일흔셋이 되었네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아요”라고 스치듯이 말한 것이 기억난다고 했다.
모리카와가 문옥주를 처음 만난 것은 1992년 3월이었다. 일본 정부가 “위안부는 민간업자가 데려간 것”이었다고 국회에서 답변하던 때였다. 모리카와는 적어도 일본 시민들은 위안부들이 강제연행된 사실을 인정하고 있음을 캠페인을 통해 알리고 싶었다. 그는 정대협에 지원을 요청했다. 그리고 문옥주가 그해 3월 27일 후쿠오카 공항에 도착했다.
문옥주는 도착하자마자 두 팔로 얼굴을 가리고 꽃다발을 들고 마중 나온 일본 활동가들을 지나갔다. 모리카와는 당시 “가해국 시민으로서 나는 온몸으로 나타내는 커다랗고 격한 ‘거부’에 경악하고 전율하고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말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 이유가 방송국 카메라 때문이었음을 곧 알 수 있었다.
모리카와는 문옥주가 버마에서 맡긴 군사우편저금을 되찾기 위해 반환청구서를 작성할 목적으로 그녀와 처음 인터뷰를 했다. 문옥주는 통역의 전언을 듣기도 전에 질문을 이해했다고 한다. 1992년 5월 12일, 일본 우정성은 군사우편저금의 원본 증서를 전달하면서 한·일 청구권 협정에 따라 저금의 지불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모리카와는 우편국 직원으로 우편저금업무를 10년 가까이 했다. 그는 증서를 보고 너무나 놀라서 ‘문옥주는 도대체 어떤 기억의 소유자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증서에는 분실해서 재발급받은 기록과 그 시기까지 문옥주가 했던 말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었던 것이다.
군사우편저금은 일본군이 점령지 등에서 군사활동을 전개하면서 군인, 군속 등을 위해 만든 야전우편국 또는 군용우편소에 맡긴 예금이다. 모리카와는 문옥주의 군사우편저금을 보고 전장에서 위안부가 군인과 마찬가지로 저금을 했음이 증명되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다. 위안부가 일본군 관리하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므로 일본군의 책임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액수 등의 문제는 당대의 맥락을 따져보아 실태를 밝히는 문제이지,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본질을 뒤흔드는 문제는 아니다. 문제로 삼자면 한·일 청구권 협정을 내세워 저금을 당사자인 문옥주에게 돌려주지 않는 것이 더 문제다.
첫 만남 이후 모리카와는 계속해서 문옥주의 이야기를 들었다. 여권을 확인해보니 1992년부터 1995년까지 한국 출입국이 18회, 대부분 2박 3일의 일정이었다고 한다. 이는 1996년 <문옥주, 버마 전선 타테(盾)사단의 ‘위안부’였던 나>(나시노키샤)의 출간으로 결실을 맺었다. 이 책은 2005년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에서 <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아름다운사람들)로 번역·출간했다.
1992~1995년에 한국 18회 찾아
1996년 10월 26일에 문옥주가 작고한 뒤에도 모리카와는 작업을 계속했다. 1997년 5월부터는 14개월간 버마에 머물면서 문옥주의 흔적을 좇았다. 그 이야기를 보태는 한편 이전의 오류를 바로잡아 낸 것이 2015년의 증보개정판이다. 모리카와와 20여년간 소통하고 지냈던 안이정선 대표는 최근까지 그녀가 틈만 나면 문옥주 할머니 이야기를 계속했다고 한다. 모리카와의 기억에 문옥주를 괴롭힌 것은 ‘양자의 빚’이었지 ‘양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반일종족주의>에서 이영훈은 이 얘기를 끌어쓰며 “이 아이가 문제였습니다”라고 적는다. 그는 문옥주가 왜 전남편이 세상을 등진 이후 전처가 낳은 아이 셋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자 모두 데려와서 키우는지, 동거남을 본처에게 보낸 후 그 본처가 아이를 낳자 왜 그 아이를 데려와 키우는지… 문옥주의 마음은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리고는 과거를 숨겼다면 고달프지만 보람찬 인생을 살았을 그녀가 ‘그 아이’와 ‘정대협’ 때문에 모든 것이 사라진 삶을 살아야 했다고 비난한다.
모리카와에게 문옥주는 강인함의 매력이 있는 여성이고 놀라운 표현력의 소유자다. 여성에게는 더없을 고통을 오랫동안 견뎌내고 고향으로 돌아온 생존자였으며, 결코 평탄하지 않았던 전후의 역사를 모친과 형제, 결혼한 남성이 데려온 아이, 게다가 양자까지 생활을 떠받치기 위해 일하며 살아온 여성이었다. 위안부 생활에 대해서 문옥주는 “부끄럽다는 것도 알지 못하고 살아왔다”고 말했으나 한편으로 “나는 그 시절 사람이 아니었어”라고도 했다. 모리카와는 이 모든 이야기를 온전히 들으려 끊임없이 애를 썼고 또 세상에 들려주려고 애썼다.
모리카와는 “그녀의 에너지 넘치는 인간성은 어떠한 폭력에도, 일본이라는 국가의 성폭력에도 결코 굴하지 않았습니다”라고 썼다. 그리고 일본 정부는 진정한 해결책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비판했다. 모리카와의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다.
“그래도 꼭 언젠가 ‘이렇게 해결했어요’라고 자부심을 가지고 대답할 수 있도록 앞으로도 계속해서 노력하겠습니다. 함께 나아갑시다.” (이 글에 나오는 모리카와 마치코의 말은 2016년 희움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특별전 ‘우리가 기억하는 당신#1 옥주씨’의 자료집에서 인용했다. 모리카와 마치코와 문옥주의 이야기는 곧 대구MBC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접할 수 있다.)
<박정애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