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해석한 한글 창제 비화
영화는 의외로 정서적인 부분에 집중하고 있다. 사건 자체를 조급하고 자극적으로 쫓기보다는 전후의 상황과 인물들의 심리에 차분히 초점을 맞춘다.
제목 나랏말싸미(The King’s Letters)
제작연도 2019
제작국 한국
러닝타임 110분
장르 드라마
감독 조철현
출연 송강호, 박해일, 전미선
개봉 2019년 7월 24일
등급 전체관람가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나랏말싸미>는 세종대왕의 이야기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그동안 세종대왕을 등장시킨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이번 영화 역시 그의 가장 큰 업적인 한글 창제를 중요한 소재로 사용한다. 하지만 대중들에겐 다소 낯선 인물인 신미 스님의 등장과 관계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공식적으로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배포되었다고 알려진 한글. 하지만 여러 가지 기록과 정황으로 볼 때 그 자체만으로는 명쾌하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마치 잃어버렸던 퍼즐 조각처럼 신미 스님의 존재는 훈민정음 창제 과정의 의문에 보다 설득력 있는 가설을 제공한다.
세종대왕(송강호 분)은 어려운 한자와 달리 백성들이 쓰고 읽기 쉬운 문자를 만들고자 오랫동안 노력해왔지만, 시작의 실마리조차 찾지 못해 난감해하고 이를 지켜보는 소헌왕후(전미선 분)의 마음은 안타깝기만 하다. 우연한 기회에 소리글자인 범어에 능통한 스님 신미(박해일 분)를 만난 세종은 그의 탁월한 능력을 알아보고 함께 작업할 것을 요청하지만 두 사람의 성품과 신념의 괴리는 신분의 차이만큼이나 멀기만 하다. 오랜 지병으로 허약해진 세종의 건강은 작업에 큰 걸림돌이 되고 설상가상으로 뒤늦게 이 사실을 눈치 챈 사대부들의 견제로 인해 상황은 점점 어려워만 진다.
영화계 프로의 늦깎이 데뷔작
감독 조철현의 이력이 이채롭다. 이번 작품이 연출로서는 첫 데뷔작이지만 지난 30여년 동안 기획, 제작, 각본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많은 작품에 이름을 올린 사람이다. 시쳇말로 영화판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인데 새삼스럽게 연출 데뷔를 한 이유는 뭘까? 죽을 때까지 영화를 하자는 동업자이자 친구인 이준익 감독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그는 농담처럼 답한다. 진실이야 어찌 됐건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이 작품 <나랏말싸미>가 다소 부담스러운 소재의 사극임에도 불구하고 첫 연출작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안정된 각본과 전개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많은 부분 상상력으로 채워진 이야기지만 감독은 최대한 현실성 있는 작품으로 보이고 그래서 더 많은 관객과 소통할 수 있길 원했다고 한다. 일단 최대한 컴퓨터그래픽(CG)을 자제하고 실제의 대상과 풍경들을 카메라에 담고자 노력했다. 배경이 되는 공간들은 대부분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된 탓에 오랜 시간 공들여 섭외했고, 가능한 한 실제 장소에서의 로케이션을 감행했다. 대사 역시 사극이라면 관습적으로 등장하는 고어체를 자제하고 최대한 현대적인 어투를 사용토록 했다. 하지만 이 영화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요소는 과거의 사건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 속에 깃든 현실사회의 그림자다. 집권층은 자신들만 누릴 수 있는 특권으로 우매한 대중들 위에 군림하기를 원하고, 선각자는 포기할 수 없는 신념과 어쩔 수 없는 타협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뇌한다.
화려하고 극적인 사건들을 극화할 수도 있었을 텐데 영화는 의외로 정서적인 부분에 집중하고 있다. 사건 자체를 조급하고 자극적으로 쫓기보다는 전후의 상황과 인물들의 심리에 차분히 초점을 맞춘다.
주도면밀 연출과 신들린 연기의 앙상블
당연히 배우들에게 의존하는 비중이 높을 수밖에 없다. 세종 역을 맡은 송강호, 신미 역의 박해일, 소헌왕후 역의 전미선 세 사람은 마치 영화 전체를 삼등분해 책임지고 있기라도 한 듯이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연기 기량을 펼친다. 공교롭게도 세 사람이 이전에 함께 호흡을 맞췄던 작품이 <살인의 추억>이었다는 사실도 뒤늦게 회자되며 화제가 됐다. 차마 바깥으로 드러낼 수 없는 각자의 슬픔과 욕망을 가슴에 품고 있는 인물들은 배우들의 과장되지 않으면서도 밀도 있는 연기로 인해 생명력을 얻고 매력적으로 되살아난다.
인물의 심리와 관계에 집중하는 연출가의 뚝심은 결말까지 일관되게 유지되는데, 그래서 자극적이고 파격적인 자극에 익숙한 요즘 관객들에겐 되레 극 자체가 밋밋한 느낌으로 전달될 수도 있겠다. 등급이 전체관람가다. ‘가족영화’라는 미명하에 소비되던 할리우드산 판타지 액션물이나 애니메이션과 달리 우리 것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해볼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가족영화라 더욱 반갑다.
올 하반기에는 세종대왕을 소재로 한 또 한 편의 영화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 중견감독 허진호가 연출을 맡은 <천문: 하늘에 묻는다>(가제)가 그것. 이 작품에서는 한석규가 세종대왕 역을, 최민식이 장영실 역할을 맡았다. 같은 시대와 인물을 다루고 있지만 다른 이야기를 펼치는 두 편을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시네프리뷰]나랏말싸미](https://img.khan.co.kr/newsmaker/1337/1337_77.jpg)
언론 시사의 경우 상영이 끝난 후 극장 안에 흐르는 기운이 개봉 후 평가나 흥행 결과를 점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되기도 한다. 영화 <나랏말싸미>의 경우 작품 자체에 대한 평가에 앞서 영화 밖의 사건들로 인한 복잡한 기운이 시사회장 안의 공기를 다소 무겁게 했다. 본격적인 간담회에 앞서 무대에 오른 제작자는 개봉 직전 연이어 발생한 사건들을 정리해 입장을 전하며 취재진에게 영화 외적인 이슈보다는 영화 자체에 관한 이야기에 집중해줄 것을 정중히 요청하기도 했다.
가장 큰 사건은 소헌왕후 역을 맡았던 고 전미선 배우의 죽음이다. 지난 6월, 전북 전주의 한 호텔에서 숨진 채 발견된 전미선은 평소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주변의 안타까움을 더했다. 제작자는 고인의 명복을 빌며 뜻밖의 사건에 함께했던 관계자들 모두 슬픔과 충격에 빠졌다고 운을 뗐다. 행여 오해의 여지가 있을까 싶어 작품의 공개 시기 연기까지 고려했지만, 유족들과 상의한 결과 그녀의 마지막 연기가 담긴 이 작품을 더 많은 사람이 보고 그녀를 기억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개봉을 결정했다고 전했다.
또 영화 <나랏말싸미>는 현재 상영금지 가처분신청에 처해 있기도 하다. 지난달 말 도서출판 나녹은 2014년 출판한 책 <훈민정음의 길: 혜각존자 신미 평전>(박해진 저)을 무단 각색해 영화화를 진행했다며 저작권 침해를 사유로 상영금지 가처분신청을 법원에 냈다. 이에 영화제작사 측은 책과 영화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중요 소재인 신미 스님의 훈민정음 창체 관여설은 책이 출간되기 훨씬 이전부터 학계에서 제기되어온 역사적 견해라며 출판사의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입장을 확고히 하며 개봉을 진행하고 있다.
<최원균 무비가이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