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도 바람도 참 좋은 계절이다. 크고 작은 꽃들이 레스토랑 손님을 맞이한다. 바람에 적당히 흔들리며 피는 꽃들이 참 예쁘다.
점심약속을 한 지인이 들어오며 신문지에 싼 뭉치를 건네준다. 농약을 안 친 건강한 먹거리란다. 예상치 않은 선물에 ‘웬 거야?’ 하며 풀어 보았다. 파란 잎채소들이다. 손끝에 전해오는 까끌한 흙의 촉감이 신선함을 더한다. 은퇴하고 무료해하는 남편이 정성을 쏟아 만든 첫 작품이란다. 전혀 예상치 못한 때에 농부의 마음을 받은 것 같아 마음이 푸근해진다. 남편의 안부를 묻는 나에게 그녀가 시큰둥하게 말한다. “친구들과 함께 등산도 가고, 소일 삼아 농사짓는 친구 밭에서 지인들과 함께 텃밭도 가꾸고 가끔 바비큐와 막걸리 한 잔씩을 걸치며 잘 지내요. 전혀 상상도 못했지만.” 나 역시 전형적인 도시 남자인 그의 지금 모습이 그려지지 않았다.

경향 DB 사진
그녀의 남편은 몇 년 전에도 이렇게 그녀를 놀래주었단다. 어느 날 신문지에 둘둘 만 것을 던지며 말했다. ‘친구가 농사지었대. 씨만 뿌리면 쑥쑥 자라 먹고도 남는다는군. 은퇴하면 그 친구가 노는 땅을 조금씩 분양해 준다며 농사지어 보래. 시장에서 더 이상 야채 살 필요 없고 재밌대.’ 그녀는 어이가 없었다. ‘당신이 텃밭을 가꾼다고? 야채를 길러 먹자고?’
그녀의 남편은 육식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더구나 ‘싱싱한 야채’ 같은 단어는 그의 사전에 없는 말이다. 마블링 좋은 한우 고기를 보면 미소지으며 말을 걸고 침을 흘릴지언정 싱싱한 채소라니…. 고기도 그냥 고기의 참맛을 즐겨야 한다며 절대 쌈을 싸지 못하게 했단다. 그런데 그런 남편이 지은 첫 농사로 나누는 기쁨을 실천한다며 여기저기 나눠주라고 성화란다. “그가 사랑하는 소가 웃을 일이지요.” 우리도 소와 함께 웃고 말았다.
육식 좋아하는 남편의 변신
나는 남편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했다. 사람은 오래 지켜봐야 진면목이 드러난다고, 그에게 그런 지순한 농부의 마음이 있는 줄 몰랐다고도 했다. 역시 우리 안에 또 다른 우리가 있지 않은가. 그때 그녀가 손사래를 치며 말한다. “사람은 절대 안 변해요!” 단호한 그녀의 말에 놀란 건 나였다. 이렇게 분위기 좋은 상황에서 뭐 저렇게까지 세게 말할까, 의아했다.
그녀는 농사의 ‘농’자도 모르는 서울 사람인 남편이 친구들 따라 농사를 짓는다며 나서는 모습에 기가 찼단다. 멀쩡한 베이지색 바지를 차려입고 나서는 남편은 골치 아픈 현실을 도피해 어디론가 도망가는 비겁자처럼 보였단다. 그런 그의 뒤통수를 향해 “상추 나부랭이나 심지 말고 자식 농사나 신경써!”라고 소리지르곤 했다.
필리핀 유학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돌아온 늦둥이 막내 녀석과 그 모습을 애타게 바라보는 자신을 뒤로하고 나서는 남편이 어찌나 야속하던지 2년 전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화가 난단다. 터울이 지는 형, 누나와 달리 뭐든지 뒤처지고 어리숙한 막내는 이리저리 치이고 있었다. 그런 막내를 남편은 이해할 수 없다며 필요한 것 다 해줬는데 뭐가 부족해 저 모양인지 모르겠다며 자꾸 야단치고 급기야 외면해버렸다. “나약해 빠진 녀석! 우리 집안에 어쩌다 저런 놈이….” 비토할 수도, 수용할 수도 없는 이 말을 남기고 남편은 늘 나가버렸다.
남편은 텃밭을 가꾼답시고 친구들과 어울려 다녔지만 익숙하지 않은 일이 재미있을 리 없었다. 그렇게 밭에는 관심 없이 세상 돌아가는 불만과 이해할 수 없는 나약한 철부지 젊은 녀석들에 대한 한탄으로 막걸리나 축내며 열 올리던 남편이었다. 그러던 그에게 슬며시 승부욕이 발동했다. 씨 뿌려 싹이 트고 잎이 나오는 친구들의 결실을 보며 차츰 다른 마음이 올라왔다. 그러나 욕심과 달리 처음엔 별 소득 없이 실패하고 말았다. 성의 없이 대강 씨 뿌리고 정성껏 돌보지 않으니 다른 친구들과는 차이가 날 게 뻔했다.
승부욕이 강한 남편은 살짝 자존심이 상했다. ‘두고봐. 내가 이깟 농사짓는 것에서 질 수 없지.’
친구들에게도 호언장담하며 이듬해엔 튼튼한 모종과 씨앗이 중요하다며 따로 구입해 심을 정도였다. 그러나 같은 땅에 심었는데 남편의 작물만 신통치 않았다. 약이 오른 남편은 평소 같으면 다시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밭일에 신경을 잔뜩 썼단다. 의욕만 앞선 그가 차지한 땅은 햇볕이 내리쬐는 널찍한 생땅이었다. 겉으론 멀쩡한 돌밭이었다.
밭의 진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때
결국 경험 있은 밭주인의 의견을 받아들여 한 해는 땅고르기만 열심히 했다. 시간 날 때마다 고르고 골라도 웬 돌이 그렇게 많은지 땅이 아니라 채석장이라며 툴툴거렸다. 그리고 올해 성공적으로 첫 수확을 거뒀다며 남편은 몹시 기뻐했다. ‘당신 그거 알아? 농사는 뭐니뭐니해도 밭갈기가 우선이야. 내가 열심히 돌 골라내고 정성을 쏟았으니 망정이지 녀석들이 까칠한 게 어림도 없어. 나를 거부한다고. 농사 아무나 하는 거 아니야.’ 마치 큰 농부나 된 듯 자랑이란다. 그러나 막상 본인은 수확의 결과에만 만족하며 주변에 나눠주는 재미에 빠졌을 뿐 여전히 소를 사랑한다며 그녀가 눈을 흘긴다.
그녀의 남편은 이제 씨앗들의 마음을 알기 시작한 농부가 됐다. 또한 자신을 거부했던 씨앗들이 자신의 정성으로 그 가능성이 발현됐다고 생각하며 자부심도 갖게 됐다. 상대의 마음을 알고 내 마음을 알기 시작하면 당연히 둘 사이에 사랑이 싹틀 수밖에. 즐겁지 않을까.
우리는 식사하며 그렇게 가족들의 안부와 근황을 말하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물론 그녀의 막내아들만을 남겨둔 채 말이다. 우리가 마주해야 할 중요한 것일수록 그만큼 저항도 따르는가 보다. 어렵게 나온 그녀의 막내아들 근황은 결국 그녀의 눈시울을 붉히게 했다. 그동안 마음고생이 많았음을 짐작케 한다.
“아직도 우리는 아들의 마음을 잘 모르겠어요. 필요한 것들을 다 해줬다고 생각하는데 뭐가 부족해서 그런지, 뭘 더 해줘야 할지 모르겠어요.”
우리는 늘 부족한 어떤 것들을 채우면 잘될 거라고 생각한다. 가끔씩은 역으로 무언가 불필요한 것들이 지나치게 많아서, 서로 상충하며 내부에서 화학작용이 일어나 예상치 않은 반응이 일어난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가 주는 사랑이 과연 상대가 원하는 사랑인지, 오히려 지금은 내부에 있는 장애물이 빠져나오게 귀 기울여야 하는 때인지 분별해야 한다.
그녀의 남편은 종종 자신이 일군 밭을 보러 간다. 밭이 드디어 숨을 쉬며 그에게 푸른빛을 선사한단다. 이제는 밭의 든든한 울타리가 된 크고 작은 돌들을 바라보며 그는 드디어 밭의 진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하지만 혹시 남편은 막내아들의 마음밭도 관심을 가지고 돌아보았을까? 그렇다면 아들의 마음밭에 있는 많은 돌들을 보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돌들을 정성껏 골라냈으면 아들의 마음밭도 많은 수확을 낼 수 있는 옥토가 되지 않을까?
<서송희 만남과 풀림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