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 프로이트가 생각하는 ‘성’은 어떤 성일까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프로이트가 말하는 ‘성’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sex’와는 다르다. 프로이트는 ‘성’을 보다 넓은 의미로 사용했다. 그는 ‘신체를 통해 얻는 모든 즐거움’을 성이라고 정의한다.

심리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심리학 하면 제일 먼저 프로이트가 떠오른다고 한다. 그리고 프로이트 하면 ‘성욕(性慾)’이 많이 연상된다고 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이름을 알고, 또 그의 이론의 내용을 잘 알고 있다고 느끼고 있지만, 사실 그만큼 많은 오해와 의혹 속에 묻혀 있는 이론가도 많지 않을 것이다. 이번 기회에 프로이트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몇 가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경향자료DB

경향자료DB

첫째 프로이트가 제일 중요한 본능(요즘에는 심리학에서는 ‘본능’이라는 표현보다는 ‘욕구’라는 표현을 더 선호한다)으로 ‘성욕’을 꼽고 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프로이트가 초기에는 성을 행동의 밑바닥에 있는 제일 강하고 중요한 동인이라고 주장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목격한 그는 왜 서로 대립하고 죽이기까지 하는지 그 원인을 성욕에서 찾기 어려웠다. 모든 행동에는 원인이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 그는 파괴적인 행동에도 원인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성욕’ 외에 ‘공격욕’이라는 또 다른 중요한 본능이 사람의 마음에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다고 가정했다.

삶의 본능과 죽음의 본능

프로이트는 성적 본능을 비롯한 자기 보존을 위한 욕구를 합해 삶의 본능, 즉 ‘에로스(Eros)’라고 불렀다. 그리고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욕구들을 죽음의 본능, 즉 ‘타나토스(Thanatos)’라 불렀다. 삶의 본능은 생명을 유지·발전시키고, 자신과 타인을 사랑하며, 한 종족의 번창을 가져오게 한다. 죽음의 본능은 파괴의 본능이라고도 불린다. 사람은 자신을 사멸하고, 살아있는 동안 자신을 파괴하며, 처벌하며, 타인이나 환경을 파괴시키려고 서로 싸우며 공격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이런 삶과 죽음의 본능들은 서로 조화를 이루기도 하고 대립하기도 하면서 우리의 마음의 세계를 움직여가고 있다.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프로이트가 생각하는 ‘성(sex)’의 정의이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성’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sex’와는 다르다. 일반적으로 성욕은 성행위를 통해 해소되고, 성행위는 남성과 여성의 성기 접촉과 그 행위에 직접적으로 수반되는 행동들만을 생각한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성’을 보다 넓은 의미로 사용했다. 그는 ‘신체를 통해 얻는 모든 즐거움’을 성이라고 정의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이도 성욕을 가지고 있고 당연히 성행위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방금 젖을 먹어 배가 부른 갓난아이가 손가락을 빠는 행위도 성행위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 왜냐하면 어린이는 손가락을 빠는 행위를 통해 촉감을 통한 신체적 즐거움을 맛보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가 프로이트에 대해 제일 오해하고 있는 부분은 그가 성욕의 해소를 무엇보다 중요시하고 더 나아가 ‘성해방’을 부르짖었다는 것이다. 여기저기에서 성의 해방을 부르짖으며 반사회적이고 비상식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이론가가 바로 프로이트다. 이들에 따르면 프로이트는 양심이나 도덕에 지배를 받고 살기 때문에 사람들이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고 위선적인 삶을 살아간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프로이트가 성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고, 더 나아가 그렇게 살라고 권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는 프로이트를 ‘성해방론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정도가 아니라 4분의 1은 맞고 나머지 4분의 3은 틀린 것이다.

프로이트가 우리의 삶이 성욕과 공격욕을 너무 부정적으로 여기고 자유로운 표현을 금기시하고 억압하고 있다고 주장한 것은 맞다. 그는 자신이 살았던 19세기 말이 지나치게 금욕적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성에 대해 금욕적이고 금기시하기 때문에 히스테리 등의 마음의 병이 생긴다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성욕과 공격욕을 지나치게 억압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본능을 성숙한 방식으로 만족시켜야 건강하고 즐거운 삶을 살 수 있다고 주장했다.

처음 본 이성에게 성욕을 느꼈을 때

하지만 정말 중요한 점은 억압된 본능을 표현하고 만족시키는 방식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프로이트는 성욕을 만족시켜야 하지만 그 방식은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방식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양심은 자라나면서 경험한 ‘사회적 규범과 윤리 등이 내재화된 것’이다. 즉 양심은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것이다.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는 것은 사회적으로도 용인된다는 뜻이다. 물론 ‘양심범’이라는 용어도 있듯이, 정치적인 견해나 종교적 신념이 당시의 사회적 규범에 어긋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런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곤 일반적으로 양심과 사회의 도덕성은 일치한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훨씬 이해하기 쉽다. 파티에서 처음 보는 이성(異性)에게 성욕을 느꼈을 경우 상대방의 의사나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욕구를 만족시키려고 성적인 행동을 했다면 이것은 사회적 규범에 크게 어긋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소위 ‘범죄’이기 때문에 당연히 사회적인 처벌이 따른다. 이 방식은 제일 미성숙한 것이다.

두 번째 방식은 성적인 욕구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억압하고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성을 보고 성욕을 느꼈다는 사실 자체가 양심에 저촉되기 때문에 양심으로부터의 처벌, 즉 죄책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 욕구가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를 외면하는 것이다. 이 방식이 프로이트가 지적한 일반인들의 삶의 방식인 것이다. 비단 성욕뿐만 아니라 양심에 거리끼는 모든 행동이 억압의 대상이 된다.

다른 방식은 이성에게 호감이 있다는 사실을 정중히 밝히고 데이트를 요청하는 방식이다. 만약 상대방도 동의를 하면 양심과 사회적 규범에 맞는 행동과 절차를 통해 다양한 방법으로 성적 만족을 얻는 관계를 맺어가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제안하는 방식은 바로 이 방식이다. 그에 의하면 이 방식으로 가능하면 많은 만족을 얻는 것이 성숙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성숙한 삶과 미성숙한 삶을 구별하는 일차적인 기준은 욕구를 개인적 양심과 사회적 규범에 맞는 행동을 통해 해결하는지 여부다. 성해방론자들의 주장이 만약 양심과 규범을 거추장스럽게 여기고 이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본능을 최대한 만족시키는 것이라면 이는 프로이트의 생각과는 거리가 멀다. 프로이트는 이런 방식을 오히려 반대하고 있다. 프로이트가 바람직하게 여기는 생활은 한마디로 정의하면 ‘즐거움은 극대화하고 처벌은 극소화하는 삶’이다. 본능적 욕구의 미성숙한 해소는 범죄이기 때문에 큰 처벌이 따른다. 이들은 처벌은 극대화하고 즐거움은 극소화하는 삶을 살아간다.

우리 사회에는 요즘 프로이트 이론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 그를 빙자하면서 미성숙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너무 많다.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명예교수>

한성열·서송희 부부의 심리학 콘서트 ‘중년, 나도 아프다’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