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인간은 존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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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들은 인간이길 포기한 것이 아니다

환자에게 바지를 꼭 입히고, 사방에 커튼이나 칸막이를 쳐 프라이버시를 보호하고, 상태가 양호한 환자가 화장실을 가기를 원하면 이동형 모니터링 기계를 달고 간호사 동반하에 화장실을 갈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가?

서울 한 대형병원 중환자실. (위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계없음)/김창길 기자

서울 한 대형병원 중환자실. (위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계없음)/김창길 기자

‘존엄’은 감히 범할 수 없을 정도로 높고 엄숙하다는 의미다. 인간은 스스로를 존엄한 존재로 보고, 다른 동식물들보다 자신의 생명을 좀 더 특별하게 여긴다. 그래서 병원에서는 그 ‘인간’의 생명을 가장 우선시해야 할 가치로 보고 생명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생명이 너무나도 소중해서 지켜야 하기 때문에 바로 그 ‘존엄성’을 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일부 중환자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중환자실 환자들은 바지를 입지 않는다. ‘바지를 입지 않는다면 외국처럼 치마형 환자복을 입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냥 바지를 벗겨놓는 것뿐이다. 마치 곰돌이 푸우처럼. 중환자실 환자는 대부분 의식이 없거나 의식이 있다 해도 중요한 장치가 많이 달려 있어서 화장실에 갈 수가 없다. 침대 위에서 대소변을 봐야 한다.

기저귀 교체하던 중에 회진 진행

누워 있는 환자의 바지를 입히는 것도, 벗기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그래서 기저귀를 교체해줘야 할 때마다 바지를 아예 벗겨놓고 작은 시트로 덮어둔다. 그 시트는 가로세로 길이가 1m 남짓이기 때문에 환자가 무릎을 세우거나 다리를 조금만 움직이면 주요 부위가 다 드러나곤 했다. 그래서 신규간호사 때 교육받은 한 가지가 바로 ‘바지’였다. “중환자실 밖을 나갈 때 바지를 꼭 입혀라.”

아픈 사람과 아프지 않은 사람, 환자와 나. 그 차이는 무엇일까. 환자가 되는 순간, 수치심과 존엄성이 사라지기라도 하는 걸까? 병원 치료만 받을 수 있다면 어떤 대접을 받든지 감내해야 하는 걸까. 의식이 없는 환자라 해도 신체가 노출되는 등의 프라이버시 침해에서 지켜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의식이 있는 환자에게서도 지켜지지 않는 것을 보고 대부분의 의료진은 포기하게 된다.

실제 의식이 있는 중환자가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것 중 하나가 여러 사람들이 있는 공간에서 대변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변을 치워달라고 요청을 하고 항문과 성기를 드러내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의학적인 사유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인력이 충분하다면 의료인과 함께 화장실을 갈 수 있는 상태의 환자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병원에는 늘 시간과 인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환자는 맨정신으로 침대에 누워서 기저귀에 대변을 본다.

이런 상황을 반쯤 포기하고 있던 어느 날, 이런 고민이 내가 예민하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어느 환자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의식은 매우 또렷했지만 기관절개술을 받아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장기간 입원으로 근육이 거의 소실되어 팔다리를 거의 움직이지 못해 의사를 표현하기 힘든 상태였다.

환자는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기저귀에 대변을 봤고 간호사들이 기저귀를 교체해주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환자의 담당교수님이 한 무리의 의사들과 함께 회진을 왔다. 의사들이 침대를 에워싸다시피 하자 자연스럽게 간호사들은 잠시 자리를 비키게 되었다. 문제는 기저귀를 교체하던 중이라서 환자의 아랫도리가 벗겨진 상태였다는 것이다.

교수님은 매우 친근하고 정중하게 치료 경과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설명했고 전공의와 의대생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가를 열심히 받아 적었다. 꽤 오랜 시간 설명이 이어졌다. 아랫도리가 벗겨진 채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환자를 보고 있자니 나는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의사들 사이를 헤집고 시트라도 대충 덮어줘야 하나.’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무렵, 환자의 손이 미미하게 움직였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향하는 곳이 어딘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환자의 손이 조금씩 조금씩 움직여서 자신의 성기를 반쯤 가리게 되자 아차 싶었던지 전공의 중 한 명이 황급히 환자의 아랫도리를 시트로 덮어주었다. ‘아…’ 하는 작은 탄식과 민망함을 담은 헛웃음이 몇 초간 지나갔다. 환자는 아랫도리에 시트가 덮여지기 전, 그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을까.

프라이버시 보호에 무뎌져가는 의료인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다. 커튼도 치지 않고 여자 환자의 가슴을 드러내놓고 심장 초음파를 보고 검사가 끝나면 앞섶을 다 풀어헤쳐둔 채 그대로 가버린다. 심전도를 찍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의식이 없거나 스스로 움직이기 힘든 환자들은 누군가 단추를 여며주기 전에는 젖가슴을 드러내놓고 있는 경우도 많다. 한숨이 절로 나오지만 간호사와 인턴의사, 전공의, 전문의들이 왜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지 이해한다.

의사들은 공식적으로만 주 88시간을 근무한다. 그러나 퇴근 후 비공식적 연장근무가 끝없이 이어진다. 또한 중환자실엔 늘 생명이 오고가는 문제들, 그러니까 먼저 처리해야 할 것들이 쌓여 있다. 그래서 의료인들은 서로 그런 것들에 무뎌져가고 있었다. ‘그래 사람 살리는 게 우선이지’,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데서 한가하게 프라이버시 타령이야.’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간호사들은 저마다 나름 꽂히는(?) 데가 있다. 어떤 간호사는 환자에게 이걸 꼭 해주려 하고, 또 다른 간호사는 아무리 바빠도 저것만은 꼭 지키려 한다. 달라 보여도 모두가 한결같이 ‘인간은 이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적어도 지금 상태가 인간이 받아 마땅한 대접은 아닐 거라고,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거라고, 나는 내가 환자가 되었을 때 이런 일을 당하고 싶지 않다고.

그동안 이런 문제제기를 쉽게 하지 못했던 이유는 병원의 반응이 뻔했기 때문이다. 환자에게 바지를 꼭 입히고, 사방에 커튼이나 칸막이를 쳐 프라이버시를 보호하고, 상태가 양호한 환자가 화장실을 가기를 원하면 이동형 모니터링 기계와 약물주입펌프 등을 달고 의사나 담당간호사 동반하에 화장실을 갈 수 있도록 도와주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지침을 제대로 지키기 위한 추가 인력은 주지 않을 것이다.

맞는 말이 적힌 종이 한 장을 부서마다 돌리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실행은 힘든 일이다. 나는 동료들의 업무를 가중시키는 역적이 되고, 환자는 프라이버시를 얻는 대신 다른 어떤 것을 내놔야 할지도 모른다. 사람이 일을 할 수 있는 물리력에는 한계가 있다. 새로운 것을 손에 쥐기 위해서는 기존에 쥐고 있던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법이다.

그럼에도 연재 마지막에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인간은 존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환자들이 이 모든 것을 참고 견디는 것은 그들이 인간이길 포기한 것이 아니라 그저 어쩔 수 없이 그런 상황에 처해진 것이다. 인간은 존엄하다. 그리고 환자는 단지 몸이 아픈 ‘인간’일 뿐이다.

‘간호사가 보고 있다’는 이번 호 연재를 끝으로 마무리됩니다.

<최원영 ‘행동하는 간호사회’ 간호사>

간호사가 보고 있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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