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조선시대 ‘하늘을 나는 수레’는 정말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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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평구가 하늘을 나는 수레를 타고 왜병에 포위된 성 안으로 들어가, 친구를 구하여 30리 바깥으로 날아 빠져나갔다”는 이야기를 근거로 오늘날까지도 비거를 복원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인간은 항상 하늘을 날고 싶어했다. 세계 어느 지역의 신화나 전설을 보아도 신들은 자유로이 하늘을 날고, 영웅들은 모험을 시작하면서 하늘을 날게 해주는 신물을 손에 넣곤 한다.

프랑스 발명가인 몽골피에 형제가 열기구를 띄운 모습을 그린 그림. / wikipedia

프랑스 발명가인 몽골피에 형제가 열기구를 띄운 모습을 그린 그림. / wikipedia

그러나 꿈과 현실 사이의 거리는 멀었다. 그리스 신화 속의 이카루스는 태양에 너무 가까이 올라갔다가 날개가 녹아 추락했다고 하지만 애초에 인간이 새처럼 근육의 힘으로 날개를 움직여 날아보려는 시도는 성공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인간의 큰 몸체를 공중에 띄우는 데 필요한 양력을 만들어내려면 인간의 가슴근육으로는 어림도 없기 때문이다. 날지 못하는 새인 닭의 가슴근육도 인간의 대흉근보다 훨씬 발달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하늘을 나는 데 필요한 근육의 양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재주꾼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도 방대한 연구노트에 여러 가지 비행장치에 대한 메모와 스케치를 남겼다. 그는 박쥐와 새 등 하늘을 나는 동물들의 날개 구조와 나는 동작을 꼼꼼하게 관찰해 기록했고, 이를 바탕으로 사람이 날개를 쳐서 움직이는 비행체를 설계했다. 또 위 아래로 퍼덕거리는 날개 대신 나선형의 프로펠러를 수직으로 달아 사람을 위로 올리는 비행체를 구상하기도 했다.

정평구의 비거, 과학관에 모형 전시

다만 오늘날 연구자들은 다빈치가 이런 기계들을 실제로 만들어 시험해보지는 않았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날개를 쳐서 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물론이려니와 나선형의 프로펠러로 날아오른다는 구상도 그림으로는 그럴 듯하지만 실제로는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공중에 일단 떠오르게 되면, 작용 반작용의 원리에 의해 프로펠러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동체도 반대방향으로 돌게 돼 비행에 필요한 추진력을 유지할 수 없다). 다빈치는 많은 빼어난 업적을 남겼지만 실제 벌여놓은 일을 제대로 끝낸 것이 매우 적기로도 유명하다. 비행기계들도 구상 단계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능동적인 비행의 꿈을 접은 사람들은 수동적인 활강에 눈을 돌리기도 했다. 낙하산, 글라이더, 또는 커다란 연 등에 사람을 실어 멀리 날려 보내려는 시도가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비행은 능동적으로 에너지를 써서 자유롭게 중력을 거슬러 올라가기도 내려가기도 하는 것인 반면, 활강은 기본적으로 중력에 순응해 낙하하는 것이다. 하지만 낙하의 속도를 줄여 천천히 내려오면서 방향을 조종해 원하는 곳에 다다를 수 있다.

활강 비행체에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기록 가운데 흥미로운 것은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정평구라는 사람이 만들었다는 하늘을 나는 수레, 즉 ‘비거(飛車)’에 대한 것이다. 신경준의 <여암전서(旅庵全書)>나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州衍文長箋散稿)>와 같은 조선 후기의 책에는 “정평구가 하늘을 나는 수레를 타고 왜병에 포위된 성 안으로 들어가, 친구를 구하여 30리 바깥으로 날아 빠져나갔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 짧은 구절은 후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해 일제강점기에도 이미 ‘조선시대에 비행기와 철갑선(거북선)을 만들었다’는 식으로 민족의 상처받은 자존심을 북돋우려는 이야기들이 이런저런 책자에 실려 퍼져 나갔고, 오늘날까지도 비거를 복원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정평구가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에서 김시민을 보좌했던 실존인물(1566~1624)이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비거에 대한 기록 가운데 그의 이름을 뺀 나머지 이야기들은 사실 별다른 근거가 없다. 신경준의 책은 임진왜란에서 약 150년 뒤, 이규경의 책은 거의 200년 뒤에 나온 것이고,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 중에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찾아볼 수 없다. 신경준은 모호하게 ‘<왜사기>에 실린 이야기’라고만 전하고 있고, 이규경의 기록도 양은 많으나 다른 나라의 이야기들을 소개한 것이 대부분이다. 정평구 이야기는 사실 신경준의 기록을 그대로 인용한 것뿐이다. 그런데 <왜사기>라는 책은 실존하지 않으므로 결국 신경준의 말도 ‘일본의 어떤 역사 기록에 따르면’ 정도의 뜻일 뿐이다.

계몽의 시대를 상징한 거대한 열기구

물론 ‘정평구의 비거를 복원했다’는 기사도 쉽게 찾을 수 있고 관련 책도 나와 있으며, 과학관에는 모형까지도 전시돼 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를 ‘복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정평구가 비거를 만들었다고 하더라”는, 그것도 100여년 뒤에 문자로 남긴 몇 줄의 기록뿐이다. 이 정도 정보로는 비거가 실제로 존재했는지, 존재했다면 어떤 방법으로 하늘을 날았는지, 동력을 이용한 비행인지 활강이었는지 등도 입증할 길이 없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북선도 오늘날 그 생김새와 구조에 대한 몇 가지 설이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비교적 자세히 묘사한 글과 그림이 남아있는 거북선도 이럴진대, 구체적인 기록도 거의 남아있지 않은 비거를 만들었다면? 그것은 항공공학을 이미 알고 있는 현대인들이 ‘이 정도라면 날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에 맞춰 만들어본 상상의 산물이지, 역사적 복원이라고는 할 수 없다.

중력을 거슬러 올라가는 비행이라면 다들 1903년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 실험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에너지를 이용한 능동적인 비행이라면 기구 비행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프랑스의 형제 발명가 조셉-미셸 몽골피에와 자크-에티엔 몽골피에는 따뜻한 공기가 위로 올라가는 현상을 응용해 사람을 태울 수 있는 거대한 열기구를 만들었다. 양, 오리, 닭을 태운 최초의 동물 비행은 1783년 9월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에서 루이 16세와 마리 앙트아네트가 군중과 함께 지켜보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약 460m 높이까지 올라갔던 동물들이 무사히 돌아온 것을 본 루이 16세는 사람을 태우고 비행하는 것을 허락했고, 10월에는 동생 에티엔이 직접 기구에 타고 수십 m 상공에 올라가는 데 성공했다. 동력을 이용한 최초의 유인비행이었다. 이 공로 덕분에 형제의 아버지 피에르 몽골피에는 귀족 칭호를 받았다.

지금의 시각에서 이런 기구는 느리고 불편한, 그리고 위험하기도 한 비행수단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18세기 말 프랑스 사회에서 하늘을 나는 거대한 풍선은 자연의 한계를 돌파하는 인간 이성을 상징했다. 대혁명 직전의 프랑스에서는 낡은 사회체제와 새 철학이 대립하는 가운데 과학이야말로 새로운 지식과 힘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옛날에는 기본 원소의 하나라고만 여겼던 ‘공기’가 사실은 여러 기체의 혼합물이었다는 것이 알려졌고, 같은 공기라도 온도에 따라 밀도가 달라진다는 사실도 과학자들의 실험을 통해 밝혀졌다. 열기구는 당시 과학의 최신 성과에 힘입어 탄생한 새 시대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김태호 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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