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를 위해 무엇이 최선일까?
각종 의료기계를 주렁주렁 달고 고통스러워하는 연명치료가 옳은 것일까
‘살려주세요’가 아니라 ‘살리지 마세요’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DNR.’ DNR은 ‘소생시키지 말아 달라(Do Not Resuscitate)’의 줄인 말이다. 이게 무슨 얘기일까.
지난해 2월부터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이 시행됐다. 일명 ‘존엄사법’으로도 불린다. 이런 법이 통과된 것은 ‘살리지 말아 달라’는 요구가 많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중환자실에서 일하다 보면 그런 요구가 납득이 간다. 중환자실은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라는 말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현대의학이 빠르게 발달하면서 예전 같았으면 죽었을 사람들을 많이 살려냈다. 스스로 숨을 쉬지 못하는 환자에게는 인공호흡기가, 심장이 제대로 뛰지 않는 환자에게는 인공심박동기가, 혈압이 위험할 정도로 낮은 환자에게는 승압제, 콩팥이 망가진 환자에게는 투석기….
영화와는 다른 참혹한 모습
문제는 ‘환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려냈느냐’는 것이다. “최선을 다해 달라”는 보호자의 요구에 할 수 있는 모든 치료와 시술을 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환자를 위해 과연 무엇이 ‘최선’일까? 치료를 하는 것은 전문가인 의료인들이지만, 짧은 설명을 듣고 치료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비전문가인 보호자다. 치료과정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없는 보호자들이 생각하는 최선이 과연 환자에게도 최선이 되는 걸까? 중환자실에서는 결정을 번복하고 후회하는 보호자들도 자주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게 다시 인공호흡기 관을 빼달라고 하거나 그게 마지막일 줄 몰랐다며 환자를 깨워달라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일 때가 대부분이다.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무의식 환자들은 잠자듯 누워 있는 모습이 대부분이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아름답지 않다. 오래 누워 있는 환자들은 근육이 전부 소실되어 뼈에 가죽만 씌워 놓은 듯 앙상한 팔다리에 관절만 툭 불거져 있다. 혼자 뒤척이거나 움직이지 못해 뼈마디가 튀어나온 곳은 욕창으로 살이 썩어들어 간다. 신장이나 심장이 망가져 순환이 제대로 되지 않아 팔다리가 부종으로 코끼리 다리처럼 부풀어 오른 사람도 있다. 코와 입과 옆구리, 가슴, 서혜부 등에는 온갖 관들이 꽂혀 있다.
의료기기나 약물의 도움을 받아 건강하고 행복한 상태로 수명이 연장되는 것을 마다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니, 약간의 장애나 불편을 감수하게 되더라도 좀 더 오래 사는 걸 선택하는 사람이 더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상태로 생명이 연장되는 건 아니다. 심각한 뇌손상으로 의식이 없는 채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의식은 있지만 모든 장기가 심각하게 망가져서 기계를 주렁주렁 단 채로 간신히 살아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모습은 이미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내게도 문득문득 힘겨운 순간들이 다가온다. 고통스러워하는 환자를 보면 ‘이게 과연 옳은 일일까’ 하는 고민이 든다. 환자가 치료과정에 대해 이해하고 동의한 상태라고 할지라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볼 때면 왠지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치료에 대한 설명을 들을 새도 없이 상태가 나빠져 수술이나 시술을 받게 된 경우 환자가 그 상황를 어떻게 이해할지, 우리가 치료랍시고 그에게 주는 수많은 고통들을 기꺼이 받아들일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2015년 메르스가 유행할 때 일이다. 나는 메르스 병동에 있었다. 호흡곤란으로 급격히 상태가 악화된 환자가 왔다. 그런데 그는 심하게 몸부림을 치며 저항했다. 급한 환자라 자초지종을 설명할 시간은 없었다. 우리는 환자의 사지를 묶은 채, 기도 내에 인공호흡기 관을 넣었다. 다행히 치료 후 환자 상태는 호전됐다. 당시 그는 우주복 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어서 외계인에게 잡힌 것처럼 굉장히 두려웠다고 말했다. 그 환자처럼 건강을 되찾은 경우라면 그나마 ‘해피엔딩’이지만 회복 가능성이 희박한 환자에게 고통스러운 시술이나 치료를 이어가야 할 때면 이것이 고문과 무엇이 다를까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
사람의 몸에 상처를 내고, 여기저기를 뚫어 관을 꽂는 행위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치료 목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적인 ‘치료’를 달성할 수 없다면, 아무리 좋은 의도라 해도 용납이 되는 걸까? 원시시대 주술사들은 악령을 쫓아준다며 사람들의 두개골에 구멍을 냈다고 한다.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인상을 찌푸리며 끔찍하다고 여긴다. 어쩌면 지금의 의료행위도 미래 사람들이 보기에는 비인도적이지 않을까?
감히 어떤 삶에 대해 ‘의미가 있다’, 혹은 ‘없다’고 말할 순 없다. 나는 환자들이 좁은 침대에 묶인 채 고통받는 모습을 보면서 “연명치료를 받고 싶지 않다”는 확신이 생겼지만, 1분이라도 더 심장이 뛰고 피가 흐르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람마다 다를 테지만 나는 적어도 병원에서의 죽음이 어떤 것일지 그 실체를 좀 더 알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환자에게 질병의 진행과정이나 치료과정을 충분히 설명해줄 여유도, 인력도 없다. 환자가 알아서 이것저것 조사해온다고 한들 공장처럼 돌아가는 병원은 환자가 원하는 방식대로 모든 것을 맞춰서 해줄 수 있는 시스템도 아니다. 전문적인 호스피스 시설 역시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많은 환자들은 등 떠밀리듯이 그 고통스러운 치료의 과정에 몸을 싣게 된다.
<엔딩노트>라는 일본영화에서 감독은 암에 걸린 아버지와의 마지막을 담아내고 있다. 나는 그 영화에서 주인공의 마지막 모습이 현대의학의 힘을 빌린 가장 인간적인 방식의 죽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치료과정에서 환자는 늘 충분히 설명을 듣고 선택할 수 있었고, 그와 동시에 치료가 잘 되지 않았을 경우에 대비해 본인이 원하는 장례식도 준비한다. 전통적인 방식이 나을지, 종교적인 방식이 나을지 여기저기 딸과 함께 방문해보고, 장례식에 초대할 사람 명단을 가지고 아들과 농담을 주고받는다.
현대의학에서는 죽음이 치료의 실패인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삶의 마지막 과정이다. 생전에 관계를 맺었던 많은 것들과 한꺼번에 이별을 해야 하기 때문에 죽음은 굉장히 슬픈 일이지만, 우리가 그 과정을 얼마나 준비하느냐에 따라 죽음의 과정에서 당사자가 소외되지 않고 인간적인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 나는 우리도 충분히 그렇게 만들어나갈 수 있고, 그 과정에 대해 더 관심을 기울일 때라고 생각한다. 아툴 가완디의 책 제목처럼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았으면 한다.
<최원영 ‘행동하는 간호사회’ 간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