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 조종 자체가 과학은 아니라 해도, 비행기가 상징하는 것은 분명 과학이었다. 대중은 안창남이 세계 최초나 최고의 비행사가 아니었다 해도 비행기가 상징하는 새로운 세계, 새로운 시대에 열광한 것이다.
![안창남의 비행기 소식을 다룬 <동아일보> 1922년 12월 11일자 3면.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https://img.khan.co.kr/newsmaker/1320/1320_62.jpg)
안창남의 비행기 소식을 다룬 <동아일보> 1922년 12월 11일자 3면.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몇 차례 다루었다시피 일제강점기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뛰어난 한국인 과학자들이 없지 않았다. 리승기, 이태규, 우장춘, 김양하, 석주명 등 적잖은 과학자들이 세계 과학계가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내놓았다. 이들의 소식은 한반도에도 널리 보도돼 사람들에게 ‘과학조선’의 희망을 안겨 주었다.
그런데 이렇게 한국인 과학자들의 소식을 가끔씩이라도 신문을 통해 볼 수 있게 된 것은 대체로 1930년대 중반 이후의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 전에는 한국인들이 과학에 대해 생각할 때 누구를, 무엇을 떠올렸을까? 이광수가 <무정>에서 주인공의 입을 빌려 “조선사람에게 무엇보다 먼저 과학을 주어야겠어요”라고 부르짖은 것이 1917년의 일인데, 그렇다면 본격적인 한국인 과학자가 양성되기 전에 ‘과학조선’이라는 말은 누구를, 무엇을 두고 썼을까?
“조선이 과학의 조선이 되고”
오늘날처럼 국민 모두가 학교라는 제도에 들어가 비슷한 교육을 받고 공통의 과학상식을 배우게 되기 전,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 변해가는 과도기에 살았던 한국인들에게 ‘과학’이란 추상적 지식보다는 신기한 물건의 모습으로 먼저 다가왔다. 굉음과 연기를 내뿜으며 질주하는 기차, 천리 밖의 소식도 눈 깜짝할 새 전해주는 전신, 목소리와 영상을 마술처럼 재생해 보여주는 유성기와 영사기 등이 근대의 문턱에 선 한국인들이 느끼고 접한 과학이었다.
그 중에서도 사람들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역시 비행기. 무거운 엔진을 단 커다란 기계가 사람을 태우고 하늘을 나는 것은 무엇보다도 신기한 구경거리였고, 구경꾼들은 과학이라는 것 덕분에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에 새삼 경탄했다. 오늘날의 누군가는 고속버스 타듯 무심히 타는 교통수단일 뿐이겠지만, 비행기를 처음 본 이들은 과학의 힘을 그 어떤 책을 읽었을 때보다도 강렬하게 느꼈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과학의 조선’이라는 말을 한국인의 뇌리에 깊이 새긴 이가 전문 과학기술 연구자가 아니라 비행사 안창남(1901~1930)이었다는 사실이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안창남은 흔히 최초의 한국인 비행사로 알려져 있지만, 최초의 비행사는 아니고 ‘한반도 상공을 날았던 최초의 한국인 비행사’라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최초로 비행을 배운 한국인은 1920년 2월 미국 캘리포니아 레드우드시 비행학교를 수료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가 6인이다).
안창남은 경성에서 태어나 휘문고보에 입학한 엘리트였지만, 비행사를 꿈꾸며 휘문고보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20년 7월부터 11월까지 일본 코구리(小栗) 비행학교에서 비행기 제조법과 조종술을 배웠다. 졸업 직후인 1921년 4월부터 모교의 교관이 되었고, 5월에는 일본 최초의 비행사 자격시험에 합격해 정식 비행사 면허를 받았다. 당시 17명이 응시했는데 합격자는 두 명뿐이었고, 안창남이 수석이었다. 민간인 비행사는 일본에서도 막 태동하던 직업이었으므로 안창남은 자신의 실력만으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이다. 1922년 11월에는 도쿄와 오사카 사이 우편비행 경기대회가 열렸는데, 전체 참가자 가운데 단 8명만 왕복 비행에 성공했고 그 가운데 안창남이 대만인 사문달(謝文達)과 더불어 식민지 출신으로는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한국인 비행사가 일본인 비행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일본에서 활약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한반도에 기쁜 소식으로 전해졌다. 그리고 1920년대의 한국인들은 한국인 비행사의 출현 그 자체를 ‘과학의 진보’로 받아들였다. <동아일보>는 ‘조선의 과학계를 위하여’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조선의 제1 항공가 안창남군이 조선에 자연과학을 촉진하는 데 장차 비상한 영향과 비상한 동기를 만들 것”이라는 기대를 드러냈다. 나아가 이미 한반도에서 유명인사가 된 안창남의 고국 방문과 비행 시연을 추진했다.
<동아일보>가 성금 운동을 벌여 가며 추진한 안창남의 고국 방문 비행은 큰 화제가 되었다. 안창남은 1910년대와 1920년대에 자전거 경주에서 숱하게 일본인을 꺾고 우승하여 영웅이 된 엄복동과 함께 노래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1922년 12월 10일, 안창남은 자신의 비행기 ‘금강호’를 몰고 여의도 비행장을 이륙해 서울 상공을 돌았다. 동아일보사는 “과학에 관한 지식과 취미를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이에게 보급케 하고자” 행사 관람료를 받지 않았다. 그를 보기 위해 여의도에는 당시 경성 인구의 약 6분의 1에 이르는 5만명의 인파가 몰려들었고, 지방에서 올라오는 이들을 위해 임시열차가 편성되기도 했다. 안창남은 직접 쓴 전단을 비행기 위에서 뿌렸다. 전단에서 그는 우리 민족이 예로부터 뛰어난 발명을 많이 했지만 현재의 과학기술에는 뒤떨어져 있음을 한탄하면서, 그의 고국 방문이 “조선이 과학의 조선이 되고 아울러 다수한 비행가의 배출과 항공술의 신속한 발달”의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호소했다.
이것이 왜 과학이 아니겠는가
안창남은 이듬해 일본인도 따기 어려웠던 1등 비행사 면허를 따 다시 한 번 이름을 알렸다. 하지만 1923년의 관동대지진 때 일본인의 테러를 피해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뒤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중국으로 건너가 항일운동 조직에 가담했다. 이후 중국에서 비행사를 양성하며 활동하다가 1930년 비행사고로 사망하였다. 앞으로의 활약이 더욱 기대되던 중 안타깝게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떴지만, 그가 호소했던 ‘과학의 조선’은 비행기의 강렬한 경험과 함께 한국인들의 뇌리에 남았다.
당시에도 비행사를 과학의 대표자로 이야기하는 것이 불편했던 이가 있기는 했다. 당대 최고의 엘리트이며 서양 사정에도 능통했던 윤치호는 자신의 일기에 안창남이 “새로운 비행기를 발명한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발명한 비행기의 조종술을 배운 1000명 중의 1명일 뿐”인데 사람들이 지나치게 호들갑을 떤다며 불편한 속내를 적기도 했다.
그러나 1000명 중의 한 명이라 해도, 당시 한국인에게 미친 영향이 어찌 작다 하겠는가? 비행기 조종 자체가 과학은 아니라 해도, 비행기가 상징하는 것은 분명 과학이었다. 대중은 안창남이 세계 최초나 최고의 비행사가 아니었다 해도 비행기가 상징하는 새로운 세계, 새로운 시대에 열광한 것이다.
공학자이자 과학 대중화 운동가였던 김용관이 세운 ‘발명학회’는 1930년대에 대대적으로 ‘과학계몽운동’을 펼치는데, 1935년에는 ‘과학의 노래’(김억 작사, 홍난파 작곡)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 노랫말의 1절은 “새 못되어 저 하늘 날지 못노라 /그 옛날에 우리는 탄식했으나 /프로펠라 요란히 도는 오늘날 /우리는 맘대로 하늘을 나네 /과학 과학 네 힘의 높고 큼이여 /간 데마다 진리를 캐고야 마네”였다. 과학이라는 낱말에 담긴 사람들의 기대 또한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김태호 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