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 이전의 세계와 이후의 세계가 달라졌다는 것은 서구사회 바깥의 사람들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최남선은 1908년 지은 ‘경부철도가’에서 철도라는 신기술이 강제한(?) 평등의 광경을 묘사하고 있다.
국내·외의 기대가 높았던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은 뜻밖에도 별다른 결론을 내지 못한 채 마무리됐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평양에서 하노이까지 육로로 사흘 동안 이동하면서 세계의 이목을 끌었는데, 비행기로 반나절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굳이 사흘에 걸쳐 철도와 자동차로 가는 까닭에 대해 많은 이들이 여러 각도에서 분석했다.
그런데 철도가 느린 교통수단이라는 것도 상대적인 생각이며, 우리가 21세기의 속도 관념에 길들어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생각해 보면 철도의 발명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류의 인식을 바꿔놓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철도라는 교통의 혁신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을 개량해 실용적인 동력원으로 만들면서 인간이 자연과 맺는 관계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인간 또는 가축의 육체적 힘의 한계를 벗어나 예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큰 힘을 자유로이 활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증기엔진이라는 새로운 날개를 달자 공장의 생산력은 눈부시게 높아졌고, 온갖 물건들이 값싸게 쏟아져 나왔다(그것을 만드는 이들이 그 물건들을 사서 혜택을 누릴 수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였지만).
혁신의 시대에 의욕적인 이들이 증기엔진이라는 신기한 물건을 수레에 달아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영국의 리처드 트레비딕은 1802년 선로를 따라 움직이는 증기기관차를 발명했고, 1812년 매튜 머리는 처음으로 증기기관차를 이용해 유료 운송사업을 벌였다. 많은 발명가들이 앞다퉈 증기기관차 개발 경쟁에 뛰어들었다. 조지 스티븐슨과 로버트 스티븐슨 부자는 영국에 철도를 이용한 대중교통 시장이 열리자 우수한 증기기관차로 그 시장을 선점했다. 로버트 스티븐슨의 기관차 ‘더 로켓’은 1829년 리버풀과 맨체스터를 잇는 선로를 차지하기 위한 시험운행에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독점적 사업권을 확보했다.
영국의 철도망은 이후 놀라운 속도로 확장됐다. 1870년까지 주요 도시 사이에 약 2만1700㎞의 철로가 깔렸고, 1914년에는 120개의 철도회사가 총연장 3만2000㎞의 철로를 운영해 영국 전역을 촘촘하게 이어줬다.
철도는 여러 면에서 혁신적인 기술이었다. 예전에는 한꺼번에 많은 양의 짐을 옮기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배에 실어 물의 부력을 이용하는 것이었다(내륙에는 이를 위해 운하를 파기도 했다). 하지만 철도가 발명된 뒤에는 증기엔진의 힘 덕에 땅 위로도 그에 못지않게 많은 짐을 나를 수 있게 됐다. 땅에 철로를 까는 것은 운하를 파는 것보다 훨씬 쉽고 돈도 덜 드는 일이었으므로 자연히 물자의 유통이 크게 늘어나게 됐고, 상품의 가격도 내려갔다.
철도는 공간에 대한 관념도 바꿔 놓았다. 산업혁명 이전 보통 사람의 일상생활은 걸어다닐 수 있는 거리 안에서 이뤄졌다. 하지만 공공 철도가 운영된 뒤로는 마부를 부릴 정도로 부유하지 않은 보통 사람들도 비교적 싼 값에 기차를 타고 먼 거리를 오갈 수 있게 됐다. 그러자 도시 바깥에서 저녁과 밤을 보내고 아침에는 기차를 타고 도시의 일터로 나오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도시 바깥은 집값도 비교적 쌌을 뿐 아니라 범죄와 오물, 감염병 등 도시의 열악한 환경으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교외’라는 공간, 그리고 그곳에서 ‘출·퇴근’한다는 개념도 철도의 보급 이후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철도가 생기면서 시간에 대한 생각도 바뀌게 됐다. 철로 위를 오가는 수많은 열차들은 운행시각을 지켜야 했다. 그러자 다른 지역에서는 시간도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골칫거리가 되었다. 예전에는 도시마다 자기들 머리 위로 해가 가장 높이 뜨면 정오라고 여겼지만, 철도망이 깔린 뒤에는 리버풀의 시간과 맨체스터의 시간을 똑같이 맞추지 않으면 큰 혼란이 일어날 수 있었다. 영국 전역의 시간을 그리니치천문대에서 관측한 시간에 맞춰 통일하고 나아가 지구 전체를 경도에 따라 나누어 각 지역의 ‘표준시’를 정한 것은 이런 혼란을 막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유럽 대륙이나 인도와 같이 넓은 땅덩어리에서는 문제가 더 복잡해졌다. 표준시를 정하고 그것을 적용한다고 해도, 베를린역의 시계가 정오를 가리킬 때 파리역의 시계도 역시 정오를 가리키고 있는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과학자와 기술자들은 당시의 첨단기술이었던 전기통신망을 이용해 신호를 주고받는 방법을 연구했는데, 그 과정에서 전자기학의 새로운 문제들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과학사학자 피터 갤리슨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혁신적인 통찰도 그가 스위스 특허청에서 원격 전기신호에 대한 수많은 특허출원들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싹텄을 것이라고도 주장했다(자세한 이야기는 <아인슈타인의 시계, 푸앵카레의 지도>에 실려 있다).
누구에게나 동등한 시각표는 이전보다 평등해진 자본주의적 산업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지체 높은 이라 해도 열차를 마음대로 세울 수 없고, 신분이 낮은 이라도 값을 치르면 일등석에 탈 수 있었다.
누가, 무엇을, 왜 나르는가
철도 이전의 세계와 이후의 세계가 달라졌다는 것은 서구사회 바깥의 사람들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최남선은 1908년 지은 ‘경부철도가’에서 “늙은이와 젊은이 섞여 앉았고, 우리 내외 외국인 같이 탔으나, 내외친소 다같이 익혀 지내니, 조그마한 딴 세상 절로 이뤘네”라며 철도라는 신기술이 강제한(?) 평등의 광경을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서구 열강의 침략을 당하는 이들에게 철도는 그리 반가운 존재가 아니었다. 일본이 한반도의 철도 이권을 장악한 것이나 영국이 인도에 엄청난 규모의 철도망을 구축한 것은 모두 식민지를 효과적으로 경영하기 위한 것이었다. 철길을 타고 부는 빠져나가고 침략자들은 들어왔다. 철도는 군병력과 장비를 가장 효과적으로 실어나를 수 있는 수단이기도 했다. 의병들이 가장 먼저 전신국과 철도를 공격 대상으로 삼은 것은 그들이 근대 기술 시스템의 핵심을 간파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인도 동북부의 풍토병이었던 콜레라는 영국이 건설한 철도를 타고 인도 전역으로 퍼졌고, 나아가 유라시아 전역에 창궐해 세계적 대유행에 이르기도 했다.
김정은 위원장이 중국과 베트남 국경에서 전용열차에서 내려 자동차로 갈아탄 것도 철도라는 기술이 21세기에도 여전히 두려워할 만한 힘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베트남은 중국과의 접경지대에서는 중국과 철로 레일 사이의 간격(궤간)을 다르게 유지하고 있어 중국 열차가 베트남으로 바로 진입할 수 없다. 양국간 교역에는 불편한 일이겠지만, 국경은 여는 것 못지않게 막는 것도 중요한 법이다.
<김태호 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