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저의 <그로테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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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로의 황금 궁전에서 본 로마 시대 ‘정신’

“흙냄새가 진동하고 갓도 씌우지 않은 전구로 조명을 밝혀놓은 동굴 같은 통로”를 따라 삼백여 개의 방들이 있는데 “경이로운 볼거리가 가득”했다. “복도는 새와 꽃, 복잡하게 반복되는 무늬 그림으로 장식”돼 있었다.

[정윤수의 ‘서문이라도 읽자’]카이저의 <그로테스크>

이언 매큐언은 언제든지 스웨덴 한림원의 전화를 받을 만한 영국의 소설가다. 악마가 도사리고 있는 이 거대 도시의 불안한 일상을 면도칼로 도려내는 이 작가의 작품들은 그 흔한 분류대로 이른바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갖고 있어서 곧잘 영화로도 만들어진다. 영화 <어톤먼트>(속죄)가 대표적이다.

매큐언의 비교적 짧은 소설 중에 <토요일>이 있다. 이 역시 나른하지만 왠지 불안하고 평범하지만 무슨 까닭인지 멀미가 나는, 현대 일상의 몇날 며칠을 다루고 있는데, 결론은 파국의 연속이다.

그 파국의 와중에 주인공인 외과의사 헨리 퍼론은 학회차 로마에 갔다가 네로 황제의 황금 궁전에 들어갔던 일을 회상한다. 궁전은 ‘르네상스 시대 초에 발견된’ 것으로 대부분 비공개 구역인데 극히 일부를 개방해 학회 참가자들에게 보여준 것이었다. “흙냄새가 진동하고 갓도 씌우지 않은 전구로 조명을 밝혀놓은 동굴 같은 통로”를 따라 300여개의 방들이 있는데 “경이로운 볼거리가 가득”했다. “복도는 새와 꽃, 복잡하게 반복되는 무늬 그림으로 장식”돼 있었다.

거대한 둥근 천장 꼭대기에는 구멍이 뚫려 있다. 15세기에 문화재 전문 강도들이 뚫고 들어와 황금 잎사귀 모양 장식을 훔쳐간 구멍이라고 한다. 훗날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가 이 구멍으로 밧줄을 타고 내려와서는 “그을음 피우는 등불 아래서 그곳의 도안과 그림을 베껴 그렸다.” 신경외과 의사인 주인공 헨리 퍼론은 동굴의 ‘두개골’(천정 구멍)을 뚫었을 때 보인 것은 바로 로마 시대의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그 ‘정신’을 문화사가 볼프강 카이저는 ‘그로테스크’라고 불렀다. 기괴하고 부자연스러우며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흉측한 형상 말이다. 그의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를 펼치자마자 보이는 그림이 1515년께 라파엘로가 로마 교황청 로지아의 기둥에 그린 장식화다. 소설 <토요일>과 겹쳐 읽으면, 라파엘로는 강도가 뚫어놓은 구멍으로 내려가 고대 로마 시대의 장식물을 모사한 후 이를 교황청의 기둥에 변용하여 그렸다. 교황청이라는 신성한 건물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 그 기둥에 그려진 라파엘로의 그림을 보면 인간의 신체와 자연계의 패턴이 기이하게 연결되어 있다.

카이저는 학술서치고는 비교적 얇지만 상당한 정보와 통찰이 스며 있는 이 책에서 그로테스크의 역사적·문화적 의미를 밝혀낸다. 히에로니무스 보쉬를 시작으로 프랜시스 고야에서 정점을 찍는 끔찍한 그림들, 에드거 앨런 포와 프란츠 카프카의 악몽 같은 소설들, 심지어 토마스 만의 작품에서도 그로테스크는 변용된다. 이 작품들을 분석하면서 카이저는 “현세의 이면에 도사린 채 세계를 생경하게 만드는 암흑의 세력을 대면할 때면 당혹스러움과 전율이 엄습해 오지만, 참된 예술작품은 그런 공포와 동시에 은밀한 해방감을 맛보게 한다”고 쓴다.

내 생각을 덧붙이자면, 그로테스크한 작품들은 평온한 듯 보이는 일상 속에 도사리고 있는 악마를 끄집어내서 우리 일상의 실체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해부학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그 ‘악마’가 저 어두운 숲속이 아니라 ‘나’의 내부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매큐언의 소설 <토요일>이 그렇고 천운영이나 편혜영의 작품이 그러하다. 그런 점에서 카이저가 ‘서문’에서 인용하고 있는 극작가 뒤렌마트의 문장은 도대체 그 어느 곳도 안전하지 않고 평탄하지 않은, 그러면서 겉보기에는 안정된 듯한 우리의 일상에도 여지없이 적용되는 묵시록이다.

“우리 세기의 푸줏간에서는 누구나가 무죄이며 누구나 아무 책임도 지지 않는다. 모두들 자신은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하며 일부러 이 지경이 되도록 만든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정처없이 휩쓸리다가 어딘가에 걸리는 대로 매달려 있다. 우리는 집단적으로 죄인이며 선대가 저지른 죄악에 모두 함께 걸려들어 버렸다.”

<정윤수 성공회대 문화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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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뒤척인다. 겨우내 마음 편히 잠을 자지 못해 머리에 스모그가 낀 듯 무겁다. 창밖을 보니 눈이 내린다. 이상기온이 일상이 돼간다. 기후변화의 징후인 3월 중순 눈 쌓인 풍경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고 불길하다. 자연 시스템의 불안정성만큼이나 정치와 사법 시스템 또한 아슬아슬하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둘러싼 사회적 긴장은 한국 민주주의가 직면한 불안정성을 드러낸다. 일만 년간 이어온 기후 안정성과 40여 년이 채 안 된 한국의 민주주의는 기간으로는 비할 데 아니지만, 우리 삶에 당연히 주어지는 조건으로 여겨졌던 점은 흡사하다. 이번 겨울 기후환경이든 정치체제든,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기후위기와 정치위기라는 무관해 보이는 두 위기는 사실 그 원인 면에서도 맞닿아 있는데, 효율과 성과가 최우선시되는 과정에서 다른 중요한 가치는 간과했다는 점이다. 한국사회는 산업화하는 과정에서 빠르게 성장하는 법을 배웠지만, 화석 연료 중심의 에너지 구조를 전환하는 데 게을렀고, 정치적 다양성과 세대 간의 이해를 구현하지 못했다. 우리는 경쟁을 통해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지만, 이제는 그러한 방식의 성장이 우리 사회를 갉아먹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