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경제학과 우주공학, 야구와 ‘팀 플레이’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2019년 두 명의 유망한 ‘비선수 출신’ 인물이 메이저리그의 변화를 가속시킨다. 샌프란시스코 야구 부문 사장으로 자리를 옮긴 파르한 자이디와, 볼티모어 단장 보좌로 이적한 시그 마이델이 주인공이다.

야구는 매우 어려운 종목이다. 150㎞ 언저리의 강속구를 방망이로 때리는 기술은 보통 수준을 넘는다. 훈련이 돼 있지 않으면 타석에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들다. 종목의 어려움 때문에 프로 레벨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은 ‘야구계’에 발을 담그기가 쉽지 않았다. ‘해본 사람만 알 수 있다’는 통념이 100년 넘도록 야구산업을 지배했다. 선수의 능력을 평가할 수 있는 눈은 경험을 통해 습득할 수 있다는 게 정설이었다.

영화 <머니 볼>의 한 장면 / 소니픽처스

영화 <머니 볼>의 한 장면 / 소니픽처스

야구가 ‘비(非)선수 출신’에게 문을 연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오클랜드의 ‘머니 볼’ 신화를 만든 빌리 빈 단장 역시 뉴욕 메츠의 촉망받던 유망주 출신이었다. 2002년 말, 예일대 출신의 테오 엡스타인이 보스턴 레드삭스 단장이 됐을 때가 파격적인 변화의 ‘신호탄’이었다. 당시 엡스타인의 나이는 28살. 메이저리그 사상 최연소 단장이었다. 엡스타인은 2004년 보스턴의 86년 된 ‘밤비노의 저주’를 깨뜨렸고, 시카고 컵스 단장으로 옮긴 뒤 2016년 108년 된 ‘염소의 저주’를 날려버리고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메이저리그 최초의 무슬림 단장

이후 야구는 프로선수 출신이 아닌 인사들에게 문호를 넓혔고, 이들에게 보다 중요한 일을 맡기기 시작했다. 2008년 탬파베이의 기적을 만든 앤드류 프리드먼 현 LA 다저스 사장은 월스트리트 출신이었다. 2017년 휴스턴의 창단 첫 우승을 안긴 제프 르나우 단장 역시 컨설팅 회사 출신이었다. 그리고 2019년, 두 명의 유망한 ‘비선수 출신’ 인물이 메이저리그의 변화를 가속시킨다. LA 다저스 단장에서 샌프란시스코 야구부문 사장으로 자리를 옮긴 파르한 자이디(43)와 휴스턴 르나우 단장의 오른팔에서 볼티모어 단장 보좌로 이적한 시그 마이델(54)이 주인공이다.

파키스탄 출신 부모님을 둔 파르한 자이디는 캐나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사디크가 아시아개발은행 엔지니어로 필리핀에서 일하는 바람에 어린 시절을 필리핀에서 보냈다. 1986년 마르코스 대통령을 쫓아내는 필리핀 시민혁명을 눈앞에서 겪었다. MIT에서 경제학을 전공했고, MBA 과정에 진학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성화에 못이겨 UC버클리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땄다. 자이디의 세부 전공은 행동경제학이었고, 논문은 ‘비합리성의 창을 통해 본 야구 카드 수집가들의 행동’이었다. 야구선수로서의 경험은 고교 시절 약간이 전부였지만 야구에 대한 관심은 어마어마했다. 야구선수들이 경기장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언제나 ‘경제적으로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 야구가 팀플레이라는 점에서 ‘행동경제학’이라는 전공은 유익했다.

경제학 박사 학위를 가졌지만 자이디의 꿈은 야구단에서 일하는 것이었다. 야구단 여럿에 이력서를 보냈고, 오클랜드에서 연락이 왔다. 첫해 연봉은 MBA 출신 치고 매우 적은 3만2000 달러였다.

이후 영화 <머니 볼>의 실제 주인공인 빌리 빈 단장 밑에서 보좌로 일할 기회가 생겼다. 영화 속 ‘피터’로 나온 폴 데포데스타가 LA 다저스로 자리를 옮긴 뒤 그 자리를 채웠다. 오클랜드가 2012년부터 3년 연속 가을야구에 오른 것은 자이디 단장 보좌의 역할이 지대했다. 오클랜드에서 빌리 빈을 보좌할 때 ‘빌리 빈의 세이버메트리션 왕’이라고 불렸다. 2014년 말 오클랜드를 떠나 다저스 단장으로 승진했고, 2019시즌을 앞두고 샌프란시스코의 야구부문 사장으로 영입됐다.

자이디는 ‘행동경제학’ 전문가인 동시에 야구에 대한 열정이 넘쳤다. 무엇보다 야구라는 종목에서 다양성의 중요성을 아주 잘 아는 인물이었다. 스스로도 ‘소수자’였다. 파키스탄 부모님의 영향으로 무슬림이었다. 자이디는 메이저리그 최초의 ‘무슬림’ 단장이었다. 팀내 선수 구성과 야구를 둘러싼 정보의 다양성을 확보하고 이를 통해 팀 전체의 힘을 키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단단하고 보수적인 야구단의 기존 조직을 부드럽게 흡수하는 매력도 지녔다.

프리드먼 사장과 자이디 단장 등 다저스 수뇌부가 ‘정보 전문가’로 꾸려졌을 때 <LA 타임스>의 스티브 딜벡은 칼럼을 통해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딜벡은 이들을 가리켜 ‘두꺼운 뿔테안경을 쓰고 교실 뒤에 앉아서 계산기나 두드리던 녀석들’이라고도 했다. 딜벡은 칼럼 마지막 부분에서 ‘이제 다저스는 그들만의 괴짜 부대를 만들었다. 그들이 야구에 대해서 어떤 자산과 정보를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이거 하나는 확실히 알 수 있게 됐다. 이제 내 노트북이 바이러스 때문에 고장나면 어디로 가져가면 되는지 안다’라고 썼다.

심리학에 능통한 NASA 출신

자이디 단장은 며칠 뒤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스티브 딜벡 기자님 오셨나요? 저 노트북 고쳐드리려고 드라이버 갖고 왔는데요.” 미국의 야후 스포츠와 하드볼타임스 등은 ‘자이디 단장이 1차전을 이겼다’고 전했다.

시그 마이델은 더 독특한 이력을 지녔다. UC데이비스에서 기계공학과 항공공학을 전공했다. 새너제이대학에서는 경영학의 한 분야인 오퍼레이션 리서치와 인지심리학에서 석사학위를 땄다. 공학과 수학, 심리학에 능통한 마이델은 미 항공우주국(NASA)에서 일했다. 마이델은 NASA의 피로 대응 전문그룹에서 생물수학 전문가로 일하면서 우주정거장 내에서 일하는 우주인들의 효율적인 수면 패턴을 연구했다. 낮과 밤이 없는 곳에서 일하는 이들의 올바른 수면 관리를 위한 연구였다.

마이델의 더욱 독특한 이력은 UC데이비스 재학시절 ‘아르바이트’였다. 마이델은 방학이면 캘리포니아 북부의 휴양지 레이크 타호의 카지노에서 블랙잭 딜러로 일했다.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에 따르면 마이델은 이곳에서 도박 참가자들의 의사결정 패턴을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 이는 나중에 야구경기의 여러 가지 의사결정 방식의 패턴을 분석하는 데 유효한 경험으로 작용했다.

마이델 역시 ‘머니 볼’의 영향을 받았다. 야구 기록에 관심이 많았던 마이델은 ‘머니 볼’ 출간 이후 야구단 업무에 관심을 뒀고, 윈터미팅을 직접 찾아가 구직활동을 했다. NASA를 그만두고 2005년부터 세인트루이스에서 야구 통계 전문가로 일하기 시작했다. 당시 세인트루이스 스카우트 책임자였던 제프 르나우가 2012년 휴스턴 단장으로 옮길 때 함께 이동하면서 휴스턴의 2017년 우승을 만들었다. 마이델이 참여한 선수 성장 예측 시스템은 휴스턴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마이델은 그저 ‘숫자쟁이’에 머물지 않았다. 2017시즌 동안 마이델은 휴스턴 산하 마이너리그 싱글A 팀에서 보조코치 역할을 했다. 어린 선수들이 실제 현장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성장을 도모하는지 직접 지켜보는 것은 물론 몸으로 함께 부딪히며 체험했다. 배팅볼을 던져줬고, 수비 훈련을 도왔다. 숫자에 경험이 더해지면 시너지 효과는 더욱 커진다. 대학생 시절 블랙잭 딜러로 의사결정 패턴들을 체험한 것과 마찬가지로, 실제 야구경기에 참가함으로써 자신의 시스템을 강화시켰다. 마이델의 코치 시절 등번호는 ‘블랙잭’을 뜻하는 21번이었다. 지금, 야구를 바꾸는 것은 오랜 선수 경험이 아니라 행동경제학과 수학, 심리학 심지어 우주공학이 어우러지는 복잡한 세계다.

<이용균 스포츠부 기자 noda@kyunghyang.com>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