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니셔티브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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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적인 의미로 봤을 때, 이니셔티브란 자기가 알아서 상황 판단을 하고, 남들이 움직이기 전에 먼저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학교에 있든 업계에 있든 미국에서는 이 능력이 없다면 생존하기 어렵다. 한국에 있을 때는 어른과 대화할 때는 눈을 피하고 목소리를 작게 하고 결코 말대꾸를 하지 말라고 배웠다. 미국에서는 사람과 대화할 때는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가 어떻든 나이가 몇 살이든 눈을 똑바로 보고 자신감 있게 말하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질문을 하지 않으면 겸손한 사람이 아니라 바보로 취급받는다. 대학원에 들어와서 세미나에 들어갈 때는 어설프게 말하더라도 일단 말하는 게 낫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가 어떤 말을 했는지는 잊을지라도, 내가 말은 했다는 그 사실만큼은 기억하기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는 아무 말도 못하는, 그래서 아무 생각도 없는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경향신문 자료사진

비슷한 예로, 한국에서는 직장에서는 상사가, 학교에서는 지도교수가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할지 계획을 잡아주고 그 과정을 지도해준다. 여기서는 꼭 그렇지는 않다. 박사 논문 위원회 지도교수들과의 지난 수년간의 관계를 생각해볼 때 그 분들이 먼저 만나자고 해서 만났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매번 내쪽에서 먼저 일정을 잡고 생각하고 있는 아이디어를 이야기했고 진행방식을 결정했다. 박사 과정에 있는 학생이라면 당연히 그 정도 이니셔티브는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존재한다. 그리고 반대로 그렇게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줘야 지도교수 쪽에서도 학생과 더 많은 것을 협업하고 지원할 인센티브가 생긴다. 두드려야 문이 열리지, 가만히 앉아 있는다고 밥그릇을 챙겨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물론 이런 이니셔티브가 모든 학생들에게서 다 발견되는 건 아니고 꼭 미국 학생들에게서만 발견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나에게 이니셔티브에 대해 가장 큰 인상을 남긴 학생은 사실 미국인이 아니라 남미 콜롬비아에서 온 대학원 동기였다. 세계은행에서 일하다가 온 이 동기는 입학할 때부터 부패 문제를 연구하겠다는 생각이 매우 분명했다. 입학할 때는 비교정치였다가 나중에 미국정치로 세부 전공을 옮겼기 때문에 초반에는 이 동기와 수업을 같이 많이 들었다. 나처럼 외국인 특유의 억양이 있는 영어지만, 꼼꼼하게 메모를 한 페이퍼를 들고 와서 매번 토론에 열띠게 참여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니셔티브는 꼭 한 국가의 문화적 특징이 아니라, 한 분야를 이끌 수 있는 자질이 있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미국에서 한국보다 이니셔티브를 발휘하는 사람들을 더 많이 볼 수 있는 건 이 큰 시장 속에서, 전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들 사이에서 경쟁을 하려면 이니셔티브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기 때문이다.

내 지도교수 때만 해도 지금 내 세대처럼 대학원에서는 통계를 깊이 배울 필요도 없었고, 데이터 사이언스, 머신 러닝 같은 말은 들어볼 일도 없었다. 시대가 바뀌면서 더 새롭게 등장해야 할 것들이 늘어난다. 우리가 학교를 평생 다니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의 경우는 누군가에게서 배우는 게 아니라, 스스로 배워야 한다. 전문가의 자격은 학위나 자격증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를 정의하고, 새로운 해결법을 스스로 찾아내는 능력이다. 새로운 데이터 수집·분석 방법이 등장하고, 그 변혁에는 이제 거의 모든 분야에서 예외가 없다. 야구부터 정치학에 이르기까지 이제 우리는 모두 데이터 사이언스를 한다. 새로운 프런티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제 뒤처지지 않는 법이 아니라, 스스로 앞장서는 법을 배워야 한다.

<김재연 UC 버클리 정치학과 박사과정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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