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 김상민
동료 연구자들은 연구가 난관에 부딪쳤을 때 인터넷도, 통화도 터지지 않는 한적한 곳에 다녀온다.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는 개포동에서 서교동까지 전철로 통근했다. 그때는 책 읽는 것밖에 못하는 킨들(아마존의 전자책 기기)을 사용했다. 이 킨들은 컬러도 흑백밖에 지원하지 않았고 폰트도 따로 고를 수 없었다. 그러나 전원은 오래 갔고, 일본 도서처럼 가벼웠다. 개포동에서 서교동까지 가는 데 약 한 시간, 다시 돌아오는 데 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하루 적어도 두 시간은 꼬박 전철 안에 있어야 했다. 이 기간에 꽤 많은 책을 읽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유학 준비를 할 수 있었던 건 이 하루 두 시간의 힘이 컸다.
대학원 들어와서는 이 정든 킨들 대신에 새 킨들을 샀다. 새로운 킨들은 책읽는 것뿐만 아니라, 음악도 듣고, 영화도 보고 거의 모든 걸 다 할 수 있는 스마트 기기였다. 이렇게 태블릿, 스마트폰 등 이른바 스마트 기기가 주변에 늘어나면서 안 좋은 점도 생겼다. 책 읽기 보다는 넷플릭스,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 등으로 미국 TV쇼를 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이로 인해 영어는 조금 향상됐다. 그러나 구해놓고 읽지 않은 책들도 늘어났다. 점점 더 불어나는 책들을 보면, 마치 정기 검진을 위해 치과에 가서 엑스레이 촬영을 한 후 예상치 않았던 충치를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찝찝함이 임계점에 다다르자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결단에 이르렀다.
일단 아내와 협의 끝에 넷플릭스를 회원 탈퇴했다. 도서관에서 아내와 내가 공통으로 좋아하는 소설가의 최신작을 빌려서 같이 읽기 시작했다. 이렇게 조금씩 내 주변의 스크린과 거리를 두기 시작한 후 며칠이 지나니 일과 육아 사이에 틈틈이 쉴 때마다 TV쇼를 보던 시간을 책을 읽는 시간으로 채워나갈 수 있었다. 기존의 습관이 빠져나간 곳에 새로운 습관이 자리잡게 됐다.
그리고 습관은 또 다른 습관을 낳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연구·육아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밤에 자는 게 힘들었다. 이때마다 스트레스를 푼다는 명목으로 넷플릭스로 TV쇼를 보거나 포털의 웹툰 같은 걸 보았다. 하지만 스크린을 쳐다보고 있으면 오던 잠도 도망갔다. 반대로 아무리 재미있어도 책을 읽다 졸리면 책장을 덮게 되어 된다. 책을 읽는 건 정신력을 많이 써야 하는 능동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힘이 든다. 일찍 자다보니 일찍 일어났고, 얼마 전부터는 아침에 조깅도 할 수 있게 됐다. 삶의 변화는 작은 것에서 시작됐다.
모든 하이테크는 인류의 적임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스마트폰이 없었다면 미국 생활이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되지도 않는 영어로 길을 찾을 때마다 길 가던 사람을 붙잡고 길을 물어봐야 될텐데, 미국은 도심이 아니면 사람이 잘 돌아다니지 않는다. 인산인해인 서울과 다르다. 하지만 구글 맵이 있으니 어디를 가든 크게 걱정이 없다. 차로 다니는 게 편하다고 걷기를 게을리하면 다리의 근육이 약해진다. 스마트 기기는 많은 걸 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게 문제이기도 하다. 그 많은 것들에 홀려서 정작 내가 해야 할 적은 것들을 제대로 해내지 못할 수도 있다. 이곳 UC 버클리에서 동료 연구자들을 보면, 연구가 난관에 부딪쳤을 때 소위 라이팅 리트릿이라고 해서 인터넷도 되지 않고, 통화도 터지지 않는 한적한 곳에 다녀온다. 그곳에서 조용히 자료만 읽고 논문만 쓰다 오는 것이다. 꼭 산 속의 암자에 들어갈 필요는 없다. 그러나 사람이 건강하고 생산적으로 살려면 하루에 덜 스마트해지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외부와 접속을 끓고 내 자신과 내 눈 앞에 놓인 과제에만 전념하는 게 필요하다. 때로는 덜 스마트해지는 게 더 지혜롭다.
<김재연 UC 버클리 정치학과 박사과정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