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권과 민주적 거버넌스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칼럼]시민권과 민주적 거버넌스

모든 인간은 존엄한가? 이 물음에 과연 오늘의 시민권은 뭐라 답할까. ‘그렇다’라는 답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국민국가는 시민권을 내세워 ‘모든 사람’이 아닌, ‘국적을 가진 사람(시민권자, 자국민)’에 한해서만 존엄성을 인정한다(난민과 이주민을 대하는 태도를 보라). 인권이 시민권에 머무는 한 ‘모든 사람’이라는 형용은 거짓에 불과하다. 게다가 국가는 경계와 구획을 기준으로 대내적으로는 통합을, 대외적으로는 배제를 의도적으로 조장한다. 국가가 그어놓은 경계 안으로 들어가려면, 즉 사회공동체의 일원이 되려면 먼저 국가로부터 일정한 인증을 받아야 한다. 주권자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인간’이기에 앞서 ‘모범국민’이 되어야 한다. 본디 사회공동체가 국가를 호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격됨과 존엄성 보장 여부를 국가가 틀어쥔 아이러니라니! 이렇다 보니 (시민)사회의 다원성과 자율성은 물론이거니와 개인의 자유마저도 국가 통치행위의 한계 내에서만 보장되기 일쑤다.

그렇다고 입만 열면 ‘작은 정부’를 외치는 (신)자유주의가 대안일까? 독점이 문제인데, 정작 독점은 해소하지 않고 독점의 주인을 국가에서 시장(자본)으로 바꾼다? 국가가 인권 실현을 위한 공공적 책무를 백안시하고 경쟁과 효율을 내세워 시장논리만을 좇다보면, 그 해악은 결국 사회공동체의 해체로 귀결되게 마련이다. 우리는 이미 공공성보다 사유화(민영화)를 앞세운 탓에 기울어진 운동장, 적자생존의 아수라를 온몸으로 겪고 있다. 평등을 저버린 자유란 그 자체로 어불성설이지만, 있다 해도 그것은 약육강식의 아수라를 의미할 뿐이다. 약자와 소수자의 존엄성을 외면하는 곳은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니다.

특정인과 특정세력의 통치 독점을 막기 위해 다양한 민주주의의 원리가 계발되어 왔다. 최근 중앙정부와 지자체가 협치(governance)를 내세우는 것도 이런 맥락일 것이다. 협치란 통치와 지배를 뜻하는 전통적 국가 작용으로서의 통치(government)를 대체하는 개념이다. 기존 국가 작용에 관료적 독점을 지양하고 시민사회의 직접참여를 통해 민주적 통치를 제고하자는 취지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정치세력 간의 야합을 협치라고 둘러대는가 하면, 거번먼트의 하청업자로 전락된 ‘말로만의 거버넌스’를 협치라고 여기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지고 있다. 기가 찰 노릇이다.

협치는 시민사회의 참여와 권력 분할을 통해 국가의 통치 독점을 지양한다. 통치의 주체를 국가, 또는 시장에서 본디 권력의 발원지인 (시민)사회로 되돌리는 것, 이것이 협치를 하는 이유이다. 국가의 통치 독점이 해소되는 만큼 (시민)사회의 역동이 되살아난다. 자치와 분권의 실현도 단지 중앙권력을 지자체로 넘기는 것을 넘어, 통치영역에 시민사회를 초대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시민 통치가 정상화되면 시민권의 지평도 넓혀진다. 더 급진적으로 말하자면, 거번먼트의 궁극적 대체개념은 협치가 아니라 자치(self government)이다. “모든 정부 가운데 최상의 정부는 우리에게 자치를 가르쳐주는 정부다.” 요한 볼프강 괴테의 말이다.

<김형완 인권정책연구소 소장>

칼럼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