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청와대와 언론에서 개념을 둘러싼 논란이 있었다. 대통령이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포용적 성장’ 정책을 언급하자 일부 언론은 이것을 ‘소득주도 성장’의 포기라고 해석했다. 다음날 대통령은 그것이 아니라면서 두 개념을 다시 설명했다. 언론의 과도한 해석 그리고 대통령의 직접 설명은 소득주도 성장 개념이 갖는 상징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소득주도 성장’이라는 개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이는 낯설음 때문에 등장부터 논란이 많았던 개념이다. 내가 이해하는 방식으로 간단히 말하면, 다양한 경제적 불평등을 개선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통해 경제성장의 모멘텀도 찾겠다는 정책이다. 분배의 개선이 성장을 후퇴시킬 것이라는 시각도 있지만, 이 정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실 분배와 성장의 관계에 관한 최근 연구들을 보면, 분배의 개선이 장기적으로 성장에도 이롭다는 결과가 압도적으로 많다. 불평등의 개선이 그 자체로 바람직할 뿐만 아니라 성장을 자극할 수 있다는 시각에 나 역시 동의한다.
소득주도 성장이라는 개념이 논란을 일으킨 이유는 그 어원과도 관련이 있다. 이 개념은 ‘임금주도 성장론’이라는 이른바 포스트 케인즈주의 경제학 이론에서 비롯되었다. 일부에서는 이 이론의 결함을 근거로 소득주도 성장 정책을 비판한다. 하지만 소득주도 성장은 정책이지 이론이 아니다. 임금주도 성장론이 이 정책에 영감을 준 것은 맞지만, 정책과 이론은 엄연히 분리되는 것이다. 특히 경제학에서 이론은 비현실적 가정을 전제로 만들어지는 반면, 정책은 복잡한 현실에서 선택되고 만들어진다. 이론이 영감을 줄 수는 있지만 그것이 그대로 정책이 될 수는 없다. 따라서 특정 이론에 기대 정책의 큰 그림을 그리려 했다면 잘못이고, 그 이론에 결함이 있다 해서 정책이 틀렸다고 하는 것 또한 옳지 않다.
경제정책의 방향을 정하는 것은 옳고 그름보다는 가치의 문제에 가깝다. 경제학은 사회과학 중에서 가장 정돈된 학문이지만, 그렇다고 하나의 답이 정해져 있는 학문은 아니다. 작은 문제의 경우 다양한 분석을 통해 대체로 하나의 결론으로 수렴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문제에 대해서는 대립되는 여러 시각이 존재한다. 큰 정책의 방향 설정은 결국 다양한 시각 중 하나를 선택하는 과정이다. 현 정부는 우리 사회의 경제적 불평등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으며 그 시정이 시대적 과제라고 판단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시정이 장기적으로 성장을 촉진할 것이라 믿고 있다. 이런 믿음이 ‘소득주도 성장’이라는 정책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진보 정부의 가치와 이념을 상징하기에 대통령이 직접 나선 것이라 생각한다. 이것이 포기할 수 없는 개념이고 정책이라면, 이제 국민들에게 더 쉽게 설명하고 또 그에 합당한 정책들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더 이상의 개념 논란은 백해무익하다.
<박복영 경희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