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문제 우회적 지적 “그게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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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리 알려진, ‘장님과 코끼리’에 관한 우화가 있다. 태어나서 코끼리를 처음 마주한 장님들이 코끼리의 기다란 코, 단단한 다리, 펄렁이는 귀 등 신체 일부분을 각각 만지고서는 그것이 코끼리의 전부인 양 주장했다는 이야기이다. 이미경 작, 김광보 연출의 연극

<그게 아닌데>는 어딘지 모르게 이 코끼리와 장님 우화를 떠올리게 만드는 작품이다.

극단 청우 제공

극단 청우 제공

이 작품에서도 논쟁의 대상은 ‘코끼리’다. 어느 날 아침, 코끼리 다섯 마리가 동물원으로부터 탈출해 도심으로 진출했고, 이 와중에 몇 마리가 선거 유세장에 침입해 아수라장을 만들었다. 코끼리들은 간신히 붙잡혀 후송되었으나, 말 못하는 동물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법. 그리하여 코끼리들을 맡아 기르던 조련사가 취조실로 불려오고, 연극은 의사와 형사가 조련사를 추궁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그게 아닌데>는 매우 단순하고 압축적인 인물 구도 속에서 작가의 문제의식을 재치 있고 명확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조련사는 자신은 코끼리를 풀어준 것이 아니라, 코끼리들이 비둘기와 거위 떼에 놀라 스스로 달아난 것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하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 조련사를 동물 성애자로 몰아가는 의사, 코끼리의 선거유세장 침입을 반대 정당의 정치적 음모라고 생각하는 보좌관과 형사, 자신의 아들이 어릴 적부터 동물을 풀어주는걸 좋아했다고 ‘착한 아들’ 프레임에 매달리는 어머니 등 주변 인물들은 당사자의 말은 듣지 않은 채 오직 자신의 관점과 입장에서 이 사건을 해석하고 고집한다. 자신의 시선으로만 사안을 바라볼 뿐, 남의 말에는 조금도 귀 기울이지 않은 채 자기가 본 것이 전부라고 하는 사람들은 ‘눈 뜬 장님’들과 다를 바 없다.

이들 앞에서 조련사는 “그게 아닌데…”를 반복한다. 사람들에게 지치고 아무리 노력해도 정상적인 의사소통을 할 수 없는 조련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이자 문제제기의 언어다.

결국 마지막에 이르러 조련사는 코끼리들이 사실은 진짜 코끼리가 아니라 말이 통하지 않는 사회에 지쳐버린 사람들이라는 진실을 밝히고자 하나, 그마저도 사람들이 들어주지 않자 스스로 5만7621번째 코끼리가 되어 다른 코끼리와 함께 떠난다. 비현실적인 환상을 통해 현실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이 작품은 다분히 우화적이라 할 수 있다.

<그게 아닌데>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구조와 언어, 그리고 배우들의 담백하면서도 능청스런 연기가 잘 어우러진 연극이다. 2012년 초연 당시 이미 동아연극상, 대한민국연극대상을 휩쓸며 소극장 연극의 힘과 매력을 재차 확인시켰고, 관객들의 요청으로 이루어진 앙코르 공연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은 바 있다. 5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오르는 이번 공연에서는 초연부터 작업에 참여했던 윤상화, 문경희, 강승민, 유성주와 함께 형사 역할로 새로이 한동규가 합류해 노련한 연기 앙상블을 보여준다. 7월 12일부터 29일까지,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

<김주연 연극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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