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예술가는 홀로 성장하지 않았다. 고흐는 밀레에게 영감을 얻었고, 세잔은 에밀 졸라와 교류하며 예술성을 키웠다. 콧대 높은 예술가로 알려진 피카소조차 앙리 마티스, 알베르토 자코메티 등과 예술적 교류를 나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미술과 무용, 퍼포먼스 등 장르를 넘나들며 협업했다.
이런 흐름은 예술계 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1960년대 미국 뉴욕의 과학자들은 인간이 점차 발달하는 기술에 소외되는 현상을 우려하며 예술가들과 협업을 시도한다. 1966년 예술가 로버트 라우센버그와 로버트 휘트먼, 벨 연구소의 공학자 빌리 클뤼버와 프레드 발트하우어는 E.A.T.(Experiments in Art and Technology: 예술과 기술의 실험) 협업체를 만들었다. 6000명이 넘는 예술가와 공학자가 더 많은 표현의 자유를 갈망하며 E.A.T.에 가입했다. 이들은 팝 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 백남준, 포스트모던 무용의 대표적인 안무가 머스 커닝햄 등을 포함한 현대예술의 유명인사들과도 교류하며 서로 다른 영역에서 협업의 가치를 발견하고 이를 통해 환상적인 예술적 성취를 이끌어냈다.
한국에 처음으로 E.A.T. 활동을 소개하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는 ‘예술과 기술의 실험(E.A.T.): 또 다른 시작’전이다. 예술과 기술의 만남이라 해서 작품 자체가 어려운 것은 아니다. 워홀의 작품 ‘은빛 구름’은 떠다니는 전구를 구상하다 탄생했다. E.A.T. 소속 공학자 빌리 클뤼버는 백열전구가 떠다니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이와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는 은색 스카치백을 사용하자고 제안했다. 클뤼버는 당시 군용 샌드위치 포장용지인 은색 스카치백에 헬륨을 채웠다. 그렇게 탄생한 워홀의 ‘은빛 구름’은 관람객의 움직임에 따라 전시장을 부유한다. 헬륨 풍선이 상용화되기 전 워홀은 E.A.T.의 도움을 받아 실험적인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다.
백남준은 레이저, 컴퓨터 프로그램 등 신기술에 관심이 많았고 벨 연구소의 공학자들과 교류하며 예술과 과학의 접점에서 다양한 시도를 펼쳤다. 1965년 미국 첫 개인전에 선보인 ‘자석 TV’도 이번 전시에 소개된다. 자석의 자장으로 TV 모니터의 음극선을 밀어내 화면이 일그러지는 원리를 이용한 이 작품은 당시 새로운 비디오 아트를 선보였다는 평을 받았다.
전시는 총 4개 섹션으로 구성됐다. 첫 번째 섹션에서는 1960년대 처음 예술과 과학의 경계를 허문 ‘협업의 시대’를 돌아본다. 두 번째 섹션 ‘E.A.T.의 설립’은 비영리단체로 출범해 예술가와 공학자 간 체계적인 협업시스템을 구축한 과정을 돌아본다. 세 번째 섹션은 현대무용, 순수예술, 미디어, 음악, 영화, 연극 등 여러 장르를 혼합한 퍼포먼스 ‘아홉 번의 밤: 연극과 공학’을 다룬다, 마지막 섹션은 예술과 과학을 넘어 교육·에너지·환경 문제로 나아간 E.A.T.의 ‘확장된 상호작용’을 살펴본다. 전시는 9월 16일까지.
<이윤정 올댓아트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