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은 근대 역사의 영욕을 간직한 곳이다. 고종은 아관파천 이후 이 곳에 머물며 나라를 다시 세우려 했고, 나라를 빼앗긴 백성들은 덕수궁 앞에서 3·1독립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일제는 이후 덕수궁을 공원으로 만든다. 1933년 왕이 머물던 석조전에는 일본 근대미술이 전시된다. 5년 뒤엔 석조전 서쪽에 2층짜리 전시건물이 완공된다. ‘이왕가미술관’이다. ‘이왕가’는 조선 황실을 일본에 편입된 왕공족의 일개 가문으로 격하하는 표현이다.
석조전에는 일본 근대미술품이, 신관에는 조선시대 이전 불상과 공예품이 전시된다. “조선인의 작품을 같은 공간에 전시할 수 없다”는 일본 예술가들의 반발 때문이었다. 근대적인 일본 작품과 대조되도록 조선의 작품은 과거의 유물만이 이왕가미술관을 채운다. 일제의 문화가 조선 미술보다 우수하다는 생각을 녹이려는 의도였다.
해방 이후 이왕가미술관은 덕수궁미술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다 각종 관공서에 자리를 내준다. 1998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이 문을 열며 ‘미술관’의 역사가 다시 열렸다. 올해 덕수궁관은 개관 20주년을 맞았다. 이왕가미술관 건립부터 따지면 80돌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이를 기념해 ‘내가 사랑한 미술관: 근대의 걸작’ 전을 오는 10월 14일까지 개최한다. 전시는 미술관 자체가 지닌 근대의 굴곡과 근대 예술작품들을 한데 조망한다. 또 80년 전 이왕가미술관에 한국의 근대미술품을 한 점도 소개할 수 없었던 ‘설욕’과 ‘한’을 씻는 자리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가 특별한 것은 ‘덕수궁미술관’을 하나의 작품으로 바라본다는 점이다. 석조전이 대한제국의 상징적 공간으로 주목받은 것과 달리, 미술관은 일본인 건축가가 설계했다는 이유에서인지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나카무라 요시헤이가 설계한 미술관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창한 3분할의 양식을 그대로 도입해 중앙홀을 중심으로 3×3m를 확장한 고전주의 건축미를 뽐낸다. 2014년 11월 일본에서 발굴돼 이번에 처음 일반에 공개된 덕수궁미술관 설계도(1936~1937)를 보면 홀, 기둥, 계단, 브리지 등 건물의 미세한 부분까지 세밀하게 고려됐음을 알 수 있다. 미술관은 건축 당시의 사진과 현재의 모습을 비교할 수 있도록 곳곳에 관람 포인트를 마련했다. 덕수궁관 정면, 원형계단, 중앙홀, 브리지 등 ‘덕수궁관 8경’을 선정해 미술관 자체를 작품으로 선보인다.
전시장을 채운 작품도 화려하다. 국립현대미술관이 개관 이후 모아 온 주요 근대 미술 작품이 나들이를 한다. 이중섭의 <투계>, 박수근의 <할아버지와 손자>, 고희동의 <자화상>, 구본웅의 <친구의 초상>, 김종태의 <노란 저고리>, 김환기의 <여름달밤> 등 근대미술사를 장식한 굵직한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발굴·소장의 뒷이야기도 재미있다. 미술관이 1972년 최고가 100만원에 구입한 박수근 작품과 1971년 20만원에 산 이중섭 작품은 현재 수십억 원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받는다. 전시장의 작품도, 80돌 미술관도 걸작의 향기를 내뿜는다.
<이윤정 올댓아트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