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우재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동교’란 이름의 인물을 자주 등장시킨다. <여기가 집이다>에서 고시원을 진짜 ‘집’으로 만들겠다며 엉뚱한 제안을 하는 고등학생의 이름도 동교였고, <햇빛샤워>에서 연탄 나눔을 통해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하숙집 아들의 이름도 동교였다.
두 작품의 동교는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비현실적이고 지나치게 이상적인 꿈을 꾸는 청년들이라는 점에서 분명 서로 이어져 있었다. 장우재 작가 역시 <햇빛샤워> 공연 전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근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젊은 친구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으며, 그래서 기존의 가치체계에 질문을 던지는 미성숙한 청년들에게 ‘동교’라는 이름을 붙여 꾸준히 등장시키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4월22일까지 공연된 장우재 작, 김광보 연출의 <옥상 밭 고추는 왜>에서도 역시 동교가 등장한다. 그런데 이번 동교는 기존의 동교들과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 미숙하지만 확고한 꿈을 품고 살아가는 청년들이었던 기존의 동교들과 달리, 이 작품의 동교는 아내와의 이혼을 앞둔 채 세상과 고립되어 살아가는, 자조적이고 무기력한 중년의 아저씨로 등장한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빌라 옥상에서 벌어진 현자와 광자의 말다툼, 그리고 그로 인해 쇼크를 받아 쓰러진 광자를 목격한 유일한 사람이지만, 어떤 발언도 하지 않는다. 그 자리에 없었던 옆집 청년 현태가 미친 듯이 화를 내고 현자에게 사과를 받아내겠다고 할 때도 그냥 뒤에서 바라볼 뿐이다. 그렇다고 동교가 스스로의 정의감과 윤리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그는 현태에게 어떻게 하면 현자로부터 사과를 받아낼 수 있는지 방법을 가르쳐주고, 뒤에서 디테일한 부분까지 세세히 코치한다. 하지만 결코 앞으로 나서거나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지는 않는다.
2015년 <햇빛샤워>의 동교는 비록 냉혹한 현실의 벽에 부딪혀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스스로의 꿈을 믿는 순수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로부터 3년 후, <옥상 밭 고추는 왜>의 동교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기대를 버리면 여러 모로 편해진다”고 자조하는 시니컬한 중년이 되어버렸다. 물론 <햇빛샤워>의 동교와 <옥상 밭>의 동교는 동일 인물이 아니다, 하지만 작가의 ‘청년성’을 상징하는 인물로서 두 캐릭터 사이의 변화는 분명 시사하는 바가 있다. 동교는 성격만 변했을 뿐 아니라, 작품의 비중에 있어서도 한 발짝 물러난 인상을 준다.
극중 가장 첨예한 갈등을 보여주는 것은 혈기왕성한 청년 현태와 기성세대를 대변하는 인물인 현자다. 동교는 이 둘 사이에 끼여멀찍이 선 채, 간접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낼 뿐이다. 대체 동교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옥상 밭 고추는 왜>는 무대 위 다양한 인간군상을 통해 삶의 현실을 바라보게 하는 횡적인 시선도 제공하지만, 기존의 장우재 작품에 나왔던 ‘동교’의 계보로부터 종적인 사유를 하게 만든다는 점에서도 흥미로운 작품이다.
<김주연 연극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