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100% 스마트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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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를 모른 채로 어중간한 대체재에 만족하는 세상에서 결국 가장 큰 손해를 보는 이들은 소비자이다.

소비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미리 말해주지 않는다. 알지 못해서다. 누군가 만들어낸 혼신의 작품을 만난 뒤에야 비로소 소비자는 자신이 정녕 무엇을 원해왔는지 깨닫곤 한다. 그리고 소비자가 느낀 그 하나하나의 쾌감의 총량이 어떤 기준치를 넘을 때 유행이 되고, 그 트렌드는 미래를 연다. 따라서 건강한 소비사회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자유롭게 신상품과 신서비스를 만들어내는지에 달려 있곤 한다.

중국 베이징 양말 노점 트럭에 ‘지푸바오(알리페이) 결제 가능’이라는 안내 푯말이 붙어 있다./경향신문 자료

중국 베이징 양말 노점 트럭에 ‘지푸바오(알리페이) 결제 가능’이라는 안내 푯말이 붙어 있다./경향신문 자료

이 자유로움은 누가 만들어야 할까? 소비자로 사는 삶은 분주하기에, 신상품과 신서비스를 찾아내 응원하는 일은 보통의 열정이 있지 않은 한 쉽지가 않다. 따라서 기존 상품을 파는 기업들이 약간만 서로 뭉쳐서 소비자의 눈을 가리면 신상품이 시장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 그래도 신문물을 요구하는 튀는 소비자가 있을 때가 있다. 하지만 기존 기업에는 다행인 것이 그 소비자들도 정말 신상품을 직접 겪어 보지는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비슷한 것을 ‘한국형’으로 만들어서 급한 불을 끈다.

한국처럼 여러 지정학적·사회적·언어적 이유로 세계와 시차가 있는 지역의 경우에는 특히 더 효과적이었다. 해외 상품을 스타일만 가져와 만들어내는 ‘한국형’ 대체상품들만으로도 신상품을 향한 소비자의 갈증을 충족해낼 수 있었다. ‘경양식’ 같은 것이다. 어차피 아무도 양식을 먹어본 적이 없으니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진짜를 모른 채로 어중간한 대체재에 만족하는 세상에서 결국 가장 큰 손해를 보는 이들은 소비자이다. 좋은 상품과 서비스가 삶에 가져다주는 풍요를 느끼지 못한 채, 어설픈 체험에 같은 비용을 지불한다면 말이다.

세월은 흘러 흘러 21세기. 스마트 세상이라지만 현실에 안주하는 소비자의 한계는 그대로다. 우리는 100% 스마트한가? 소비자로서 우리는 잘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타성에 젖어 현재를 믿어 버린다. 예컨대 한국에서는 신용카드가 충분히 편리하기에 특별히 새로운 스마트 결제가 필요하지 않다고 믿기도 한다. 하지만 그 믿음 때문에 우리는 중국 알리페이·위챗페이의 자영업자 수수료 0.1%를 맛보지 못한다. 대신 카드수수료 및 각종 간편결제수수료로 3~4%를 소비자가에 잠재적으로 보태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버도 구글맵도 제대로 맛본 적이 없으니, 현재의 질서에 최적화된 국산 택시앱이나 지도앱들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100% 겪어보지 못했으니 알 수 없는 일이다.

소비자가 스마트해질 수 있다면 어중간한 대체재는 잘 통하지 않는다. 새롭게 등장한 앱 플랫폼들과 기존 업계의 갈등은 피할 수 없는 일인지, 각종 협회가 요즈음 직접 앱을 출시하고 있다. 공인중개사협회나 배달음식업협회에 이어 숙박업중앙회도 대체 앱을 만들기로 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렇게 만든 앱들의 평이 그리 좋지 않다. 소비자는 이미 다른 옵션을 맛봤기 때문이다. 이 옵션을 가리기 위한 대체재가 아닌, 이 옵션이 주지 못한 효용을 주는 혼신의 작품을 만들어야 인정 받는 시장. 100% 스마트함이란 이런 시장을 소비자의 힘으로 되찾는 일이다.

<김국현 IT칼럼니스트·에디토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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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뒤척인다. 겨우내 마음 편히 잠을 자지 못해 머리에 스모그가 낀 듯 무겁다. 창밖을 보니 눈이 내린다. 이상기온이 일상이 돼간다. 기후변화의 징후인 3월 중순 눈 쌓인 풍경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고 불길하다. 자연 시스템의 불안정성만큼이나 정치와 사법 시스템 또한 아슬아슬하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둘러싼 사회적 긴장은 한국 민주주의가 직면한 불안정성을 드러낸다. 일만 년간 이어온 기후 안정성과 40여 년이 채 안 된 한국의 민주주의는 기간으로는 비할 데 아니지만, 우리 삶에 당연히 주어지는 조건으로 여겨졌던 점은 흡사하다. 이번 겨울 기후환경이든 정치체제든,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기후위기와 정치위기라는 무관해 보이는 두 위기는 사실 그 원인 면에서도 맞닿아 있는데, 효율과 성과가 최우선시되는 과정에서 다른 중요한 가치는 간과했다는 점이다. 한국사회는 산업화하는 과정에서 빠르게 성장하는 법을 배웠지만, 화석 연료 중심의 에너지 구조를 전환하는 데 게을렀고, 정치적 다양성과 세대 간의 이해를 구현하지 못했다. 우리는 경쟁을 통해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지만, 이제는 그러한 방식의 성장이 우리 사회를 갉아먹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