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신비 체험’ 이야기는 사실 여부를 떠나서 요셉 보이스의 ‘타타르 펠트’처럼 예술가의 ‘위악스런 거짓말’일 수도 있다. 아무튼 <토탈 리콜> <페이첵> <마이너리티 리포트> 등 몇 작품만 떠올려봐도 필립 K. 딕만의 세계를 알 수 있다.
미국의 현대소설은 유럽의 같은 시대 소설에서는 볼 수 없는 시니컬한 매력이 있다. 무심한 듯 툭 툭 던지는 한마디에 묵직한 쾌감이 실려 있다. 이를테면 레이먼드 챈들러가 빚어낸 하드보일드 탐정소설의 최고 캐릭터 필립 말로. 그는 33살에 미혼으로 키가 183㎝다. 이 정도 키가 미국에서 장신에 속하는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이 탐정을 소설 <거대한 잠>에 등장시키면서 챈들러는 특유의 시니컬한 대사를 맡겼다. 어딘가 어두운 비밀이 가득찬 얼굴을 한 여인이 찾아와서 의심스러운 사건을 맡긴다. 필립 말로는 그 음모의 세계가 풍기는 기묘한 분위기에 빠져 자석에 이끌리듯 사건을 수임한다. 여인이 한마디 한다.
“키가 크시군요.”
2차 대전 전후의 냉혹하고 비정한 미국 사회를 칙칙한 트렌치 코트에 싸구려 시거 하나 물고 뛰어다니게 되는 탐정 필립 말로가 대답한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진정 ‘쿨내’ 풍기는 이런 묘사야말로 미국 대도시의 산물이다. 과묵한 인상의 독일이나 자기 내면으로 현란하게 파고들어가는 프랑스의 현대소설에서는 이런 괴팍한 블랙 유머를 좀처럼 보기 어렵다.

미국의 대표적인 20세기 SF작가로 꼽히는 필립 K. 딕.(1928~1982)
“가는 곳마다, 누구에게나 멸시받았다”
진지하기로 친다면 금세기 그 어느 소설가보다 가장 진지한, 가히 성경의 ‘요한계시록’에 가까운 비장한 묘사로 대재앙 이후의 미래 세계를 그린 <로드>의 코맥 맥카시 또한 미국적인, 너무나 미국적인 소재를 다룰 때는 싸늘한 유머를 적절히 토핑으로 얹는다. 영화로 더 유명해진 소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한 대목을 보자. 텍사스의 황량한 벌판, 싸구려 트레일러 주택에 사는 루엘린 모스는 복잡한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총을 들고 뛰어다녀야만 하는 사건이다. 애인 루엘린에게 마지막 인사 같은 대화를 나눈다. 루엘린은 그러나 모스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모른다. 건조하지만 무슨 일인가 틀림없이 벌어질 듯한 대사가 마른 풀이 싱겁게 흔들리듯 오간다.
어디 가려고?
밖에.
어디를 가려는 거야?
할 일이 있어. 돌아올게.
무슨 일을 하려고?
그는 서랍을 열어 45구경 권총을 꺼냈고 탄약 클립을 빼내 살펴보고는 다시 집어넣고 권총을 벨트에 끼웠다.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어머니한테 내가 사랑한다는 말을 전해 줘.
당신 어머니는 돌아가셨어. 루엘린.
그렇다면 내가 직접 말하지.

영화 '블레이드 런너'의 원작이 된 필립 K. 딕의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 책 표지 사진.
그리하여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주요 인물들 모두가 천상으로 가서 안부인사를 해야만 하는 치명상의 이야기로 질주한다. 심오한 이야기부터 대중적인 스토리텔링까지 종횡무진하는 코맥 맥카시의 힘이 무엇인가를 한순간에 알 수 있는 대목이다. 2차 대전이 끝나기 직전, 드레스덴의 도축장에 갇혀 있다가 연합군의 대규모 맹폭을 직접 겪었던 미군 병사 커트 보니것이 훗날 <제5도살장>으로 끔찍한 전쟁과 그로 인한 인간성의 완전한 파괴를 증언하게 되는데, 이 또한 시니컬한 분위기가 압도한다. 주인공은 젊은 날 겪은 드레스덴 대공습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일상으로 돌아온 듯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늘 매캐한 공기가 흐르고 귓전으로는 포탄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래서 그는 일상에 집중하지 못하고, 더러 집중한다 해도, 까짓 거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지, 하는 냉소로 일관한다. 이 잔인한 냉소에는 그러나 그 어떤 미려한 언어로도 표현하기 힘든 삶에 대한 애증이 실려 있다. 개 한 마리가 그의 벗이다. 깊은 밤에 그는 샌디라는 이름의 개를 보며 다음처럼 이야기를 한다.
나는 개를 내보내거나 안으로 들인다. 그리고 이야기를 좀 나눈다. 나는 개에게 내가 녀석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개는 자신이 나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녀석은 겨자탄과 장미 냄새를 상관하지 않는다.
“너는 괜찮은 녀석이야. 샌디.” 나는 개에게 말한다. “그거 알아. 샌디? 너는 괜찮은 놈이라고.”
이제 필립 K. 딕을 말할 차례다. 1928년 12월 16일에 미국 시카고에서 쌍둥이로 태어났다. 쌍둥이 누이는 출생 직후 사망했다. 다섯 살 때 부모는 이혼하였고 그는 냉정한 어머니를 따라 캘리포니아 버클리로 이주하여 컸다. 어두운 성장과정이었다. 대학도 다 마치지 못했고 처음 성관계를 맺은 여인과 결혼하였으나 오래 가지 못했다. 필립 K. 딕은 “나는 어찌된 셈인지 가는 곳마다, 누구에게나 멸시받았다”고 술회한다.
‘신비 체험’ 겪은 뒤 놀라운 SF소설 발표
그의 사회생활도 블랙 유머만이 겨우 버틸 수 있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텔레비전 수리공이나 음반 판매원 등을 전전했다. 그러다가 1954년에 첫 작품 <솔라 로터리>를 발표하였고 그 이후로는 줄기차게 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1963년에 <높은 성의 사나이>로 휴고상을 수상했다. 이 소설로 큰 성공을 거뒀으나 늘어만 가는 빚, 자살미수, 이혼, 피해망상이 그를 괴롭혔다.
약간의 근거 있는 정황들과 심각한 망상증에 의하여 정보기관에 의한 신변상 위험을 피하기 위해 1973년 캐나다로 거처를 옮긴 필립 K. 딕은 1974년 3월 2일, 일종의 ‘신비 체험’을 하게 된다. “신성한 힘이 나타나서 내 정신을 되찾아주고 몸을 치유해 주었으며, 심미감과 기쁨과 온전한 정신세계의 감각을 선사했다”고 그는 썼다. 이를 계기로 “내 주위의 세계가 세트와 같은 가짜”임을 깨달았다는 그는 더욱 놀라운 SF의 세계를 펼쳐냈다. 이 ‘신비 체험’ 이야기는 사실 여부를 떠나서 요셉 보이스의 ‘타타르 펠트’처럼 예술가의 ‘위악스런 거짓말’일 수도 있다. 아무튼 <토탈 리콜> <페이첵> <마이너리티 리포트> 등 몇 작품만 떠올려봐도 필립 K. 딕만의 세계를 알 수 있다.
그 중 대표작이 영화 <블레이드 런너> 시리즈로 유명한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이다. 1983년에 영화화되어 근미래의 묵시록으로 평가받았으나 이번 가을에 개봉된 <블레이드 런너 2049>는 적어도 흥행면에서는 참패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속편은 전편에 깔린, 그리고 원작 소설에 깔린 잔인한 냉소로부터 너무 멀리, 너무 진지하게 벗어나버렸다. 이 소설의 민음사판 번역본에는 SF 소설계의 노벨상이라고 할 수 있는 네뷸러 상을 세 번, 휴고 상을 여섯 번 수상한 로저 젤라즈니의 서문이 실려 있다. 젤라즈니가 서문에 쓴 다음과 같은 필립 K. 딕 작품의 정수가 <블레이드 런너 2049>에는 탑재되지 않았다.
“그에게는 적절한 형용사를 찾을 수 없는 종류의 유머감각이 있다. 건조한, 그로테스크한, 슬랩스틱의, 풍자적인, 아이러닉한…. 이 모두를 그의 작품에서 볼 수 있지만, 어느 단어도 그의 유머감각을 통틀어 요약하지는 못한다. 그의 인물들은 가장 심각한 순간에 엉덩방아를 찧곤 한다. 그런가 하면 가장 우스운 장면에 애절한 아이러니가 흐르기도 한다.”
<성공회대 문화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