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 안에서 <대망>을 읽고 있는 전직 대통령의 그로테스크한 상태를. 그 바싹 마른 상태를. 그 날카로운 시간을. 그 점에서 <대망>은 소설 자체에 대한 평가와 무관하게, 기이하고도 무서운 ‘힘’을 가진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웬만한 엽기적인 정치 흑막 드라마를 초월하는 국정농단으로 수감 중인 박근혜 전 대통령이 감옥에서 일본 대하소설 <대망>(야마오카 소하치 저)을 읽고 있다는 보도를 보았다. 참으로 기묘하면서도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조합이다.
“옳거니, 싸나이라면 <대망>을 언제고 한 번은 읽기는 읽어야지.”
이런 얘기를 고등학교 1학년 때 들었다. 헌책방에서. 헌책방이란 무엇인가. 추억과 낭만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퇴락하여 쓸쓸히 사라지던 공간인데, 그 퇴락의 공간을 채우던 분위기는 대체로 무기력감이었다.
고작 고등학교 1학년에 불과했던 어린 시절의 내 눈에도 비친 동네 헌책방들의 저녁 공기는 침울했다. 헌책방 주인이 어느 아저씨와 말을 하다가, 그 무렵의 헌책방 어디에나 쌓여 있던 열몇 권짜리 <대망>을 운운하더니 “하아 과연! <대망>이지. 싸나이라면 한 번 <대망>을.” 그런 말들이었다.

야마오카 소하치의 일본 대하소설 「대망」의 실제 주인공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초상화. / 경향신문 자료사진
그때 나는 거의 감각적으로 <대망>은 굳이 신경써서 찾아 읽을 필요는 없는 책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고1짜리 아이가 무엇을 알겠는가. 다만 그 쇠락해 가는 공간의 무기력한 공기 속에 떠도는 <대망>이란 비현실적인 사람들의 비현실적인 권력감각이라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몇 번 훑어보았고, 완독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대략의 이야기는 살펴본 즉 역시 <대망>은 권력에 몸을 던졌거나 그 뜨거운 불에 몸을 데었거나 혹은 그러한 권력의 화염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몽환적으로 지향하는 감각의 제국이라는 생각이다.
수감 중인 박근혜 전 대통령이 <대망>을 읽고 있다는 보도는 오래 전 헌책방에서 이 대하소설을 두고 비현실적인 사람들이 주고 받던, 강력한 힘에 대한 공허한 탐닉을 금세 떠올리게 했다.
<대망>을 읽으며 때를 기다리는 박근혜?
이를 보도한 기사들은 추측하기를, 박 전 대통령이 이 소설을 읽으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태도와 처세에 대해 ‘공감’하고 있을 것이라고 썼는데, 아다시피 이 전국시대의 쇼군은 ‘때를 기다리는 자’였다. 실제로 박 전 대통령이 언젠가 오게 될 ‘때’를 기다리며 <대망>을 읽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대개의 기사들이 ‘<대망>을 읽으며 때를 기다리는 박근혜’라는 식으로 보도하고 있어서 안이하고 상투적으로 느껴진다.
그보다는 일본군 장교 출신으로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획득한 후 일본의 근대정신을 거의 그대로 이식하여 ‘유신정권’으로 치달았던 박정희, 그를 아버지로 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일제강점기에 훈육과 교양을 받은 자기 아버지 세대들이 즐겨 읽으며 권력과 천하를 논할 때는 응당 <대망>의 인물부터 거론해야 마땅하다는 식의 저 20세기 중엽의 문화적 풍경을, 현재 21세기의 구치소에서 판에 박은 듯이 재연하고 있는, 앙상하면서도 날카로운 그 양상을 우선 봐야 하는 것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대망>을 읽고 있지만, 문자 그대로 <대망>을 읽기보다는 권력적 분위기를 광적으로 탐닉했던 저 일본 육사 출신의 아버지 세대들의 문화적 습속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참고로 <대망>의 국내 번역판본이 몇 개 있는데 대부분 해적판이요 불법 복제판이고 솔출판사가 정식으로 번역 출판권을 가지고 있다. 그 서문에서 작가 야마오카 소하치는 이렇게 쓴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었을 때만큼 역사라는 것이 이상한 무게로 나를 억누르고, 나를 채찍질한 적은 없었다. 나는 약 1년 정도 호구를 위한 붓을 던져버리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점령군의 모습과 시책, 변해가는 풍속 등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니까 <대망>은 일본의 2차 대전 종식, 패전, 그리고 전범(戰犯)의 소산인 것이다. 대개의 일본인들이 그랬듯이 이 작가도 ‘전범의식’은 약해 보인다. 서문에서 줄곧 ‘평화’를 운운하지만 그것은 ‘전범국’의 평화 사상이라기보다는 ‘패전국’ 작가의 일반론적인 ‘평화’ 주장에 가깝다. 이를테면, 이어지는 다음의 서문 말이다.

「대망」의 표지 이미지 사진
“인류는 여전히 싸우지 않고는 달리 어쩔 수 없는 조건들만이 온통 뒤덮인 전국(戰國)의 세계 속에서 목이 터져라 그림의 떡인 평화를 갈구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새삼 우리들을 지배하고 있는 문명의 모습을 바라보며 점령 하의, 일상의 현상을 응시해보니 내 마음에 감당할 수 없는 초조감의 형태로 격렬하게 일렁이는 것이 있었다.”
이렇듯 <대망>의 작가에게 ‘평화’는 당대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지금 가파르게 실천해야 하면서도 그 지향은 반드시 보편의 인권 사상이어야 하는, 그런 평화와는 거리가 먼 그 무엇이다. 결국 소설가는 ‘인간 개조’와 ‘인간 혁명’을 강조한다. 서문의 후반부다.
“전쟁이 없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문명의 개혁이 이루어져야 하고, 문명의 개혁이 이루어지려면 그 척추가 되는 철학의 탄생이 있어야만 한다. 새로운 철학에 의해 인간 혁명이 이루어지고, 혁명된 인간에 의해 사회와 정치·경제가 개조되었을 때 비로소 원자과학은 ‘평화’로운 차세대 인류의 문화재로 바뀌게 된다.”
헌책방으로 쏟아져 나오게 되는 이유
바로 이 정신! 또는 힘! 그것에 대한 동경! 그것을 위한 ‘인간 혁명’, 그것에 의한 ‘사회 개조’, 어디서 많이 듣던 말들 아닌가.
물론 이 몇몇 단어만으로 이 작가와 소설을 ‘파시즘 문화’라고 단정해서는 곤란하지만, 그러나 ‘전범국’ 일본이 억지스럽게도 ‘패전국’임을 자처하는 것, 즉 전쟁범죄를 국가적으로 일으킨 일본이 아니라 그 무슨 ‘평화’를 추구하다가 ‘원자폭탄’ 때문에 ‘패전’했다고 여기는 무의식이 그대로 작동하는 이러한 인식은 전후 일본의 정치계와 지식계의 보이지 않는 동맹적 정서였음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정서에 깊은 영향과 감화를 받은 부류들이 5·16 쿠데타의 이른바 ‘주체세력’이었고, 그들의 시대에 그들의 서가에는 실제로 읽든 안 읽든 상관없이 <삼국지>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과 그리고 소설 <대망>이 위압적인 장식성으로 꽂혀 있었던 것이다.
그랬던 책들이 단행본 시대가 되고 강남 이주 시대가 되고 아파트 시대가 되면서 대거 헌책방으로 쏟아져 나오게 되며, 불우하고도 안타깝게도, 단 한 번도 그러한 권력의 세계에 가보지도 못한 서울이라는 대도시의 부도심권 빈민가의 헌책방에서 엉거주춤 들어서는 사람들이 그 무슨 대단한 힘이요 강력한 힘을 느껴는 보겠노라는 심정으로 <대망>을 운운하면서 “싸나이라면 역시 한 번은 <대망>을 읽기는 해야지”하는, 몽롱하면서도 만져지지도 않는 서푼어치 허세에 취하곤 했던 것이다.
소설 그 자체가 재미 없는 것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재미가 없다면야 일본에서 1950년부터 1967년까지 연재가 되고 드라마가 되고 한국에서도 정식 판본에 불법 복제본까지 스무 권이 넘도록 출간됐겠는가. 군웅이 할거하되 우선 노부나가가 죽고 또한 히데요시가 죽어가며 마지막으로 남아 궁극의 승리자가 되는 이에야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흥미롭다. 그리고 일본 사람들에게, 혹은 여러 문화사적 측면에서 이 소설이 갖는 중층적인 의미는 충분히 있다. 다만, 나는 언급하고 싶은 것이다. 감옥 안에서 <대망>을 읽고 있는 전직 대통령의 그로테스크한 상태를. 그 바싹 마른 상태를. 그 날카로운 시간을. 그 점에서 <대망>은 소설 자체에 대한 평가와 무관하게 기이하고도 무서운 ‘힘’을 가진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서문의 한 구절은 이렇게 되어 있다. “이것은 종전(終戰)이 아니라 좀 더 참혹한 미래의 전개를 위한 휴지기는 아닐까.”
<성공회대 문화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