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한 경쟁을 통해 권력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지킬 수 있는 정의로운 사장이 MBC를 되살릴 수 있다고 구성원뿐 아니라 시청자들도 믿고 있다. 이런 환경은 필요조건이 아니라 최소한의 조건이다.
11월 13일 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는 김장겸 사장을 해임했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2008년 이후 10년 동안 암흑의 시기를 보냈던 MBC 구성원들은 그 감격적인 순간을 꿈꿨는데, 드디어 그 꿈이 이루어졌다. 노동조합은 김장겸 사장 퇴진으로 71일간의 파업을 풀었다. 구성원들은 2010년 김재철 사장 취임 직후 39일, 2012년 170일, 그리고 이번에 71일 파업을 합쳐서 280일 파업투쟁이 끝났다고 표현했다. 1년치 연봉을 포기하며 공영방송 MBC를 권력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투쟁했고, 그 과정에서 9명의 해고자, 200명이 넘는 징계자와 유배자가 만들어졌다. MBC 신뢰도와 영향력은 속절없이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맞은 해방은 기뻤지만 서글펐다. MBC 구성원들이 가진 자산은 아무 것도 없다. 사방이 폐허였다.
폐허만 남은 MBC
MBC 전임 사장들이 싼 똥(?)이 너무 많았다. 보도국의 경우가 심각하다. 김재철 전 사장이 검찰에 피의자로 출두하던 날, 해직된 박성호 전 기자회장은 “왜 그렇게 서둘러 파업 대체인력으로 시용기자를 뽑았느냐”고 물었다. 해고되고 유배지로 보낸 유능한 기자들 대신 뽑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취재기자, 정직한 영상기자들 대신 철학 없는 영상으로 화면을 채우는 VJ들이 <뉴스데스크>를 만들었다. 이진숙 현 대전 MBC 사장, 김장겸 전 사장은 보도책임자 시절 정체를 알 수 없는, 뉴스만 봐서는 기자라고 불러도 되는지 의심스러운 경력기자들을 대거 채용했다. 간부급으로 채용된 어떤 기자는 전 직장에서 ‘청와대 출입할 때 이명박 대통령의 특별한 예쁨을 받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들이 만든 기사에서 당연히 있어야 할 비판의식과 균형감각은 볼 수 없었다. 태극기집회와 촛불집회를 5대 5로 비교하거나, 태블릿 PC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방법으로 ‘디스’하거나, MBC 경영진을 노골적으로 비호하는 뉴스를 ‘청부 생산’했다. 한 기자는 최순실 국정농단이 한창일 당시 “일요일 뉴스데스크에서만 분량이 줄었다. 신문이 안 나온 날이라 참고할 기사가 별로 없어서라 하겠다”고 밝혔다. 실제로 연합뉴스 등 베낄 대상이 없으면 기사를 못 쓰는 기자들이 수두룩했다. 일터 윤리는 완전히 망가졌다.
제작현장 역시 마찬가지다. 안광한 전 사장은 마치 자신이 모든 프로그램의 제작PD인 양 자막부터 캐스팅까지 간섭을 했다. 자신이 참석하는 쇼에서 자신을 비추는 리액션 컷까지 지시했다고 한다. 무지를 넘어 횡포였다. 실상 안광한 전 사장은 제작 경험이 거의 없었다. 비전문가에 의해 전문가들이 무시당하는 사례들이 속출했다. 예능 파일럿 프로그램 하나 만드는 데 제작PD들은 담당 부장·국장을 어렵게 통과해도 예산권까지 틀어쥔 편성의 쓸데없는 참견을 들어야 했다. 때로는 프로그램 문외한인 경영진 앞에서 PT 요구까지 들어줘야 했는데, 사실상 편성규약을 어기는 것뿐 아니라 제작PD로서 자존심을 마구 해치는 일이었다. 결국 MBC 수익 대부분을 책임지는 예능PD 가운데 핵심 인력 10여명이 회사를 떠났다. 사장들은 ‘떠나는 PD들은 돈을 보고 떠난다’며 떠난 사람, 남은 사람 모두를 모욕했다. 핵심 인력이 떠나고 경쟁력이 하락하면 모든 책임은 다시 제작PD들에게만 뒤집어 씌워졌다.
드라마 부문에서는 막장이 상관없다며 예산은 줄이고 시청률만 요구하는 사장과 본부장들 사이에서 드라마PD들의 창의성이 발휘될 리 만무했다. 예능과 마찬가지로 10여명이 넘는 드라마PD들이 MBC를 떠났다. 지금도 떠난 PD들이 잘 만든 드라마들이 각종 케이블에서 재방송되고 있다. MBC는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하는가?
모든 상황을 종합해보면 MBC가 마주한 위기는 바로 ‘프로페셔널의 위기’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제대로 된 상식적인 사람들이었다면 김재철·안광한·김장겸을 언론인 최고 수장인 MBC 사장으로 뽑지 않아야 했지만, 어쨌든 그 사람들이 사장이 되어 버렸다. 이런 비상식적인 상황에 대해 반성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제 MBC를 재건하기 위해 새로운 선장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필요조건은 나온 셈이다,
MBC 새로운 선장은 누가 되어야 하는가?
먼저 가장 중요한 지점은 결국 정치권이다. 정치권이 과도하게 개입할 경우 프로페셔널한 언론 정신들이 완전히 훼손되는 걸 우리는 지난 시절 뼈저리게 경험했다. 실력과 가치관으로 제대로 평가받고 사장이 되는 게 아니라 정치적인 연줄을 이용해서 밀실에서 사장이 임명되는 동안 MBC는 완전히 망가졌고 정권도 망가졌다.
지금의 정치권이 과거 실수를 되풀이할 정도로 어리석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절대선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이미 YTN 사장 선임과정에서 많은 이들의 신뢰를 잃었다. 만약 현 정치권, 특히 여권이 MBC 사장 선출과정에 부적절하게 개입한다면 폐허의 MBC는 다시 난장판이 될 것이다. 공정한 경쟁을 통해 권력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지킬 수 있는 정의로운 사장이 MBC를 되살릴 수 있다고 구성원뿐 아니라 시청자들도 믿고 있다. 이런 환경은 필요조건이 아니라 최소한의 조건이다. 벌써부터 무슨 이런 저런 인연들이 들리고 있다. 제발 실력으로 승부하길 바란다.
두 번째로 언론에 대한 확실한 철학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언론은 권력에 대해 가차없는 비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권력에 대한 비판은 그 권력에 소외될 수 있는 99% 시민들에 대한 봉사가 수반되는 처절한 선택이다. 과정에서 많은 고통이 수반되더라도 자신의 삶 속에서 이를 실천했던 사람이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자신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도 가차없는 사람이어야 한다. 언론은 그 자체로 권력이다. 권력이기 때문에 더욱 냉정하게 행사해야 한다. 한때 MBC는 공영방송으로 많은 일들을 했지만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MBC는 완전히 실패했다. 특히 저널리즘에 입각한다면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다. 공기(公器)가 아니라 흉기(凶器)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이런 실패를 남들이 다 아는 ‘권력에 의한 장악’이라는 프레임으로 변명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MBC는 지난 10년간을 내적으로 제대로 반성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제 MBC는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프로페셔널의 다른 이름은 ‘기본’일 수도 있겠다. 노동조합을 할 권리, 언론의 자유, 이해충돌 방지 등등의 원칙은 적어도 헌법과 법률에 나온 원칙들이다. 이런 게 깨지면서 직장 내 민주주의와 직업윤리라는 원칙도 무너졌다. 이제 원칙을 지키는 MBC 사장이 보고 싶다. 제대로 된 프로페셔널이 보고 싶다.
<김재영 PD(PD 수첩 등 연출, 파업 멈추고 방송 준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