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립 10년 한국진보연대 상임공동대표 한충목… 민주·민생을 넘어 근원적 모순에 도전하는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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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20일 서울 정동 프란체스코 교육회관에서 ‘해외민주통일인사 귀국추진위원회’가 발족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입국이 거부되고 있는 해외동포의 입국을 추진하는 모임이다. 이 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에 함세웅 신부, 최병모 변호사, 이창복 6·15 공동선언 남측실천위원회 상임대표 등 70~80대 쟁쟁한 원로가 선임됐는데, 비교적 ‘젊은이’ 한 명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한충목 한국진보연대 상임공동대표(60)다.

-입국하지 못하는 해외인사가 몇 명이나 되나.

“일본에 한통련 손형근 의장을 포함해 10분이 있고, 미국에 10여분, 유럽에도 10여분 등 모두 40여분 된다. 이것은 일종의 동포 블랙리스트다. 해외에서 민주화·통일운동을 하던 이 분들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모두 자유롭게 입출국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비판하니까 입국이 거부된 것이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마땅히 들어와야 한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지 얼마인데, 아직도 입국이 거부된다는 것인가.

“그렇다. 미국에서 활동하던 평화운동가 이주연씨가 작년에 이어 올해도 입국이 거부됐다.”

[원희복의 인물탐구]창립 10년 한국진보연대 상임공동대표 한충목… 민주·민생을 넘어 근원적 모순에 도전하는 통일운동가

공동위원장·공동대표 여러 차례 맡아

문재인 정부 출범 5개월이 넘는 지금, 간단히 처리될 이런 적폐가 방치되고 있다는 것은 의외다. 출범식이 열린 이날 조헌정 전 향린교회 담임목사도 “심각한 것은 촛불항쟁 이후 새 정부가 들어섰음에도 이러한 귀국 차단행위가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라고 우려를 나타냈다. 게다가 70~80대 원로들이 공개적으로 나서 추진위원회까지 구성해야 할 정도라면 지금 청와대가 시민사회와 하는 ‘협치’(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거버넌스 즉 협치이고, 정당 간 연대는 연정이다)는 빵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튼 한 상임공동대표가 이렇게 쟁쟁한 사회 원로와 나란히 공동위원장을 맡을 수 있었던 배경은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 아무리 능력이 출중해도 연조가 있는데 말이다. 기자가 ‘나이에 비해 너무 일찍 고위직에 오른 것 아닌가’라고 질문하자 그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무슨 말씀을…. 내가 그 분들을 모시고 일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맡지 않으려고 했는데 귀국 못하시는 분 대부분이 통일운동에 관계된 분으로 우리 한국진보연대에서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해서 맡은 것이다. 어른들을 모시는 차원이고 나는 옆에서 돕는 것이다. 절대 그렇지 않다.”

기자는 흔히 인터뷰 초·중반 상대의 ‘기선 제압성’ 질문을 몇 개 준비한다. 이것은 그런 성격의 질문이었다. 그러나 솔직히 이쪽 ‘업계’(진보운동 진영)에서 그는 주목되는 활동가로 꼽힌다. 그가 맡았던 공동위원장이나 공동대표만 해도 6·15 남측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 겨레하나, 국보법 폐지 국민연대, 이라크파병 반대 비상국민행동, 민주주의민족통일 전국연합 집행위원장 등등 다 열거하기 어렵다. 좋게 말하면 정열적인 활동가고, 좀 깎아 말하면 ‘오지랖’이 넓은 것이다. 이에 그는 “대중 조직 연합체인 민주주의민족통일 전국연합(전국연합) 집행위원장을 10년 넘게 하다보니 여러 단체 행사에 같이 끼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진보연대 상임공동대표다. 얼마 전 창립 10주년 기념식을 가진 한국진보연대는 우리나라 ‘재야’의 맥을 잇는 중요 사회단체다. 과거 70년대 박정희 유신시절과 80년대 전두환·노태우 정권시절 우리나라 민주·인권·통일·노동운동을 이끌던 ‘재야’라는 것이 있었다. 2중대 혹은 꼭두각시 소리를 듣는 야당에 들어가지 않고 정치권 밖에서 운동을 ‘지도’하고 ‘행동’하던 선명 세력을 통칭 ‘재야’로 불렀다. 이 재야의 지도자로는 함석헌 선생과 윤보선 전 대통령, 문익환 목사, 백기완 선생 등을 꼽을 수 있다.

고독하게 투쟁하던 이들은 80년대 YS(김영삼 전 대통령)와 DJ(김대중 전 대통령)에 의해 제도권 정치로 영입됐다. 고 김근태 장관, 이해찬 전 국무총리, 이재오·김문수 전 의원을 비롯해 이인영·우상호 의원과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 등 80년대 대학총학생회장 모임 전대협의 ‘스타’가 그들이다. 87년 6월항쟁으로 경제정의실천시민연대(경실련)를 비롯해 참여연대와 같은 시민단체가 생겨나기 전까지 재야는 야당의 중요한 정치 충원 창구였다.

“진보연대는 1985년 문익환 목사와 백기완 선생의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1989년 이부영·이창복 선배의 전민련(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과 1991년 이창복·오종렬 선배의 전국연합(민주주의민족통일 전국연합)을 거쳐 2007년 민중연대와 통일연대가 합해 한국진보연대로 이어지고 있다. 박석운 대표는 민중분야, 나는 통일분야로 역할을 분담하고 있다.”

시민단체, 이익단체 등 망라한 진보연대

과거와 달리 지금 진보연대에는 시민사회단체뿐 아니라 민주노총과 같은 이익단체는 물론 정당까지 포함한다. 한 상임공동대표는 “현재 농민·여성·청년·대학생·빈민 등 40여개 단체가 참가하고 있고, 민주노총은 참관단체로 가담하고 있다”면서 “과거 통합진보당이 참가했다가 해산됐고, 이번 15일 다시 창당되는 민중당이 들어올 예정”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민주화를 위한 교수협의회(민교협), 민족문제연구소, 4월혁명회, 전태일재단 등 우리에게 낯익은 단체도 있고,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전국빈민연합 등도 가입돼 있다. 이들 가입단체는 각자 전국적 조직을 갖추고 있어 가입 조직원이 얼마인지는 정확히 추산되지 않는다.

-시민연대와 진보연대 가입단체의 차이는 무엇인가.

“보는 관점에 따라 차이가 있다. 시민단체가 민주주의와 민생·환경·인권문제를 중심으로 대중적 시민운동을 한다면, 진보연대는 이와 함께 통일이라는 더 근원적인 모순 해결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진보연대는 민생·민주에 평화통일이 확장돼 있다.”

-시민단체는 정치적 중립을 내세우지만, 진보연대는 정치활동까지 한다.

“우리는 민생·민주·자주 평화통일에 동의하는 모든 단체를 망라한다. 이를 대중운동으로 실천하기 때문에 여기에 동의하는 단체·정당까지 가입할 수 있다. 과거 민주당은 우리와 연대는 하더라도 몸을 섞긴 싫어했고, 통합진보당은 같이 한 것이다.”

또 다른 차이는 시민단체가 후원회원 기반의 중앙 상근자 중심으로 활동한다면, 진보연대에 속한 단체는 회원의 자발적 참여가 활발하고 지역조직이 치밀한 특징이 있다. 이런 대중동원 능력은 이번 촛불혁명 과정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진보연대는 이번 촛불의 시작인 민중총궐기투쟁본부에서 민주노총과 전교조, 그리고 전농과 함께 중요 단체였다. 그는 2007년 당시 진보연대 상임운영위원장 직무대행 시절 권영길 민주노동당 위원장과 함께 ‘민중총궐기’를 주창했다.

“민중이 총궐기해 민생문제를 해결하자는 주장은 훨씬 오래전부터 있었다. 동학농민혁명이 민중총궐기의 전형 아닌가.(하~하~) 민중총궐기라는 말은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 민생문제가 거의 파탄된 상태여서 상층의 민주투쟁만으로는 부족하다, 밑에서부터 기층민중이 주체가 되는 대중투쟁을 하자는 의미로 붙인 것이다.”

-이번에 민중총궐기는 박근혜 퇴진의 결정적 역할을 했다. 현직 대통령을 끌어내려 감옥에 보낸 것은 4·19혁명 때도 못한 혁명적 사건이다.

“촛불항쟁으로 현실 대통령인 박근혜를 감옥에 보내고, 동시에 경제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는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도 감옥에 보냈다. 숨은 권력이자 ‘공안 대통령’인 김기춘까지 감옥에 보냈다. 누가 봐도 혁명적 상황이었다.”

한 상임공동대표는 “민중의 분노를 제대로 조직할 지도자가 필요한데, 그 역할을 한 사람이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과 김영호 전농 의장”이라며 “두 사람이 전국을 돌면서 설득하고 조직한 이번 촛불혁명의 주역”이라고 말했다.(인터뷰 끝나고 저녁자리에 참석한 한 인사는 ‘민주노총과 전농에 이어 한국진보연대도 촛불 공신록에 포함돼야 한다’고 증언했다)

9월 20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해외 민주통일인사 귀국 추진위원회’ 발족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민플러스 제공

9월 20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해외 민주통일인사 귀국 추진위원회’ 발족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민플러스 제공

노동운동하다 청년통일운동에 뛰어들어

그는 1957년 전북 임실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여섯 살 때 서울로 와 쭉 서울에서 산 서울사람이다. 양정고를 졸업하고 78년 고려대 병설초급대학에 입학했다가 학내문제로 그만두고 83년 건국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시절 ‘안민회’(도산 안창호 선생의 흥사단) 활동을 하다 85년 학내시위로 처음 구속됐다. 그는 80년대 중반 전대협 의장과 같은 화려한 ‘스타’ 경력 없이 제적과 복교를 거듭하다 결국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

그는 성수동에서 노동운동을 시작했지만 곧 청년운동으로 바꿔 ‘민족통일애국청년회’를 통해 청년·통일운동에 뛰어들었다. 89년 한국청년단체협의회장 등을 거치고 92년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결성과 범민족대회를 주최했다. 이 혐의로 징역 3년 실형을 선고받는 등 네 번이나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별을 달았다.(대학 때 집시법 위반 한 번)

그래서 진보연대를 포함한 통일운동단체는 과격단체, 혹은 종북단체로 몰리기 일쑤다. 이는 어찌 보면 통일운동가들의 ‘숙명’이다. 그는 “이렇게 행동하면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될 것이라는 걸 모르지 않는다”면서 “그렇지만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통일단체가 북한의 사주를 받았다는 국가정보원이나 검찰 공안부, 특히 이명박·박근혜 시절 공안세력의 일방적 발표는 믿을 것이 못된다.

-2010년 검찰은 한 공동대표가 2004~ 2007년 베이징·개성 등지에서 북한 공작원을 만나 지령을 받아 국가보안법 철폐운동을 벌였다고 발표했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시절 남북공동행사와 대북지원사업으로 북한을 100번 넘게 갔다 왔다. 물론 모두 통일부 허가를 얻고 합법적으로 갔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의 국정원에서 100번 넘게 방북한 것 중 5번이 통일부 허가 밖 행동이었다고 구속한 것이다. 이 대목 모두 재판에서 무죄로 판명났다.”

-문재인 정부에서 진보운동은 남북평화운동으로 바뀌고 있다.

“현직 대통령을 감옥에 보냈지만 나는 무엇보다 근원적이고 심각한 적폐는 바로 분단적폐라고 생각한다. 분단적폐를 청산하고 통일의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 촛불의 완성이라고 생각한다.”

-남북 당국자 간의 통로가 꽉 막혔을 때 민간차원에서 돌파구를 마련하는 것도 한 방법 아닐까.

“방향적 제안은 한다. 그런데 북·미관계가 워낙 첨예하게 붙어서…. 개인적인 생각으로 내년 2월 열리는 평창동계올림픽은 세계적 축전이고 중요한 계기다. 그런데 2월에 한·미 키리졸브 훈련이 있다. 키리졸브 훈련을 하면 북한 참가는 어려울 것이다. 우리가 미국을 설득해 키리졸브 훈련을 상당기간 연기해야 한다. 이런 카드로 북에도 새로운 협상안을 제시해야 한다.”

-이럴 때 진보연대도 북한에 핵실험 자제와 함께 평화기류에 합류하라고 요구해야 하지 않나.

“우리들도 한다. 당연히 여러 번 했다. 우리는 늘 북이 먼저 도발하는 것으로 알고 언론도 그렇게 쓴다. 하지만 세계사를 보면 분쟁은 미국이 먼저 벌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거대국가 미국이 북한을 70년 넘게 목 조르고 있다. 목을 조르면서 핵과 미사일 실험을 하지 말라면 되나. 일단 조르는 목을 내려놓고 핵실험 그만하고 협상하자는 것이 상식적이지 않나.”

그는 30여년 넘게 민주화·통일운동을 하면서 한 번도 월급을 타보지 않았다. 경제활동은 같이 운동을 하는 아내(손미희·전국여성연대 상임대표)가 맡고 있다. 어떤 세상을 꿈꾸느냐는 질문에 그는 자주 문익환 목사를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문 목사님을 열정의 통일운동가로만 알고 있지만, 시인이고 의술에 밝은 분”이라며 “그분의 맑고 따뜻함, 그리고 굉장히 가정적인 삶을 바라보며 비슷하게 살려고 얘쓴다”고 말했다.

<글·사진 원희복 선임기자·우철훈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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