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은 간결한 분량 속에서 살인의 수많은 가능성과 조건들을 나열하고 독자를 혼란에 빠뜨린 다음 생각지도 못했던 멋진 해결책으로 인도한다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라든가 헨닝 망켈의 ‘형사 발란데르’ 시리즈, 아르드날뒤르 인드리다손의 ‘형사 에를렌뒤르’ 시리즈, 요 네스뵈의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이 목록은 21세기 들어 수많은 한국 독자들을 사로잡은 북유럽 미스터리의 대표 명사들이다. 영미권과 일본에 집중되어 있던 미스터리 시장의 판도를 단숨에 바꿔놓은 스칸디나비아 반도는 놀랍도록 춥고 어둡고 황량하다. 기나긴 어둠과 차가운 설원이라는 대조적인 풍광 속에서 끔찍한 살인은 지독하게 자주 일어나고, 수사관들은 인간과 자연 양쪽을 상대하며 정의를 향한 힘겨운 투쟁을 벌여야 한다. 그리고 이 같은 고독한 투쟁은 다름 아닌 50여년 전 무명작가 두 사람의 손끝에서 시작되었다. 위에 언급한 ‘대표 명사’들의 선조이자 원본인 작가 마이 셰발과 페르 발뢰 말이다. 요 네스뵈는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스칸디나비아에서 범죄소설을 쓰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자신들이 자각을 하든 못하든, 마이 셰발과 페르 발뢰에게 영향 받았다.”
1960년대 진보정치 잡지에서 주로 활동하던 기자 마이 셰발과 페르 발뢰는 ‘복지국가’라는 타이틀로 전 세계의 부러움을 사던 스웨덴의 내부에서 꿈틀거리는 위험한 인종차별과 여성혐오, 계급갈등을 예리하게 주시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저 여느 선진국의 보편적인 치부라고 여기고 쉽게 넘겨버릴 수도 있었던 이런 갈등이 어떻게 사람들의 정신을 타락시키고 끔찍한 범죄로까지 연결되는지 효과적으로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주로 썼던 ‘기사’ 형태가 아니라 ‘픽션’을 통한다면 좀 더 많은 이들에게 ‘계몽’이 다다를 수 있지 않을까?
애거사 크리스티가 식상하다고?
그리하여 1년에 한 권씩 총 10권으로 구성된 ‘형사 마르틴 베크’ 시리즈가 등장하였다. 여기에는 현대 독자들에게 익숙한 정교한 법의학적 지식이나 놀라운 정보 관련 시스템은 존재하지 않는다. 피해자를, 그리고 가해자를 정확히 알아내기 위해 끈질기게 발로 뛰는 이들만이 생생하게 살아 숨쉰다. 자기 직업에 지겹도록 회의를 느끼면서도 결국은 범죄를 미워하기 때문에 반드시 사건을 해결하겠노라 다짐할 수밖에 없는 피곤한 경찰들의 희로애락이 기가 막힌 통찰력으로 펼쳐진다. 그야말로 사회파 미스터리의 원조인 동시에 걸작으로 자리매김할 수밖에 없는 뛰어난 이 시리즈를 놓치지 말기를 권한다. 국내에는 시리즈의 1·2권에 해당하는 <로재나> <연기처럼 사라진 남자>가 출간되었고, 곧 후속작들이 속속 번역될 예정이다.
다음으로는 애거사 크리스티다. 여기까지 말하고 나면 너무 시시하다고 여길까? 정말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등 크리스티의 대표작들을 심지어 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각 범인들의 정체를 알고 있다. 범인까지 훤히 알고 있는 마당에 그 작품들을 굳이 읽어야만 할까?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다. 새삼스럽지만, 애거사 크리스티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미스터리의 세계를 완성한 작가이기 때문이다.
셜록 홈스의 등장 이후 모두가 정교한 트릭과 천재적인 명탐정을 만들어내려 몰두하고 있을 때, 크리스티는 누구보다 넓게 멀리 내다보았다. 그녀는 미스터리의 암묵적인 규칙들을 아예 파괴해버렸다. 크리스티의 작품들 속에서는 탐정인 줄 알았던 이가 범인이며, 진범은 ‘한 명’이어야 한다는 규칙은 가볍게 철회되고, 죽은 이(정확하게는 죽은 줄 알았던 이)가 범인으로 밝혀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크리스티의 미스터리를 읽을 땐 1인칭 ‘나’의 내레이션에 안심할 수 없고, 죽었다고 판명된 이가 정말 죽은 게 맞는지 끊임없이 의심해야 한다. 심지어 수십 년 전 살인사건을 눈으로 보지 않은 채 현재 사람들의 증언만으로 해결해야만 한다. 범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트릭의 구조에 골몰할 게 아니라, 범죄를 둘러싼 인물들의 심리상태를 먼저 알아야 한다.
‘그/그녀는 왜 죽어야만 했을까?’라는 질문을 먼저 던져야만 한다. 그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며 크리스티는 겉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모든 설정들을 누구보다 먼저 창조해냈고 멋지게 격파했다. 크리스티 이전에 그런 작가는 없었고, 크리스티 이후에도 그녀를 뛰어넘는 건 대단한 도전이었다. 가장 놀라운 점은 크리스티의 소설들은 모두 지금 기준으로는 대단히 짧다는 점이다. 그 간결한 분량 속에서 크리스티는 살인의 수많은 가능성과 조건들을 나열하고 독자를 혼란에 빠뜨린 다음 생각지도 못했던 멋진 해결책으로 인도한다. 얼마 전에 출간된 시모쓰키 아오이의 ‘백과사전’ <애거사 크리스티 완전공략>을 참고 삼아 옆에 두고 그 책에 소개된 순서대로 크리스티 전집을 독파해 나간다면, ‘옛날 사람’ 혹은 ‘너무 유명해서 굳이 또 읽어야 할까 싶은 사람’이라는 편견이 파괴되는 과정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에도시대 다룬 사회파 미스터리 연작
마지막으로 미야베 미유키의 ‘에도시대 미스터리’ 연작을 추천한다. 대표작 <화차> <이유> <모방범>에서 신용불량자와 부동산 투기, 소년범과 사이코패스 등 현대사회의 가장 큰 문젯거리들을 무시무시한 박력으로 그려냈던 인상이 워낙 강해서일까? 미야베 미유키의 수많은 작품 목록에서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는 시대물 미스터리는 상대적으로 덜 읽히는 것 같아 늘 아쉽다.
일본의 근대화가 시작된 17세기 에도시대는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계급구조의 격렬한 변화와 함께 그 계급에 고착되어 있던 사람들의 의식 역시 근본적으로 바꿔놓는 시기이기도 했다. 끔찍한 범죄가 하나의 기담으로만 소비되면서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은 알지 못하는 영역으로 남겨두어야 한다던 오래 전의 믿음은 인간의 행위에는 인과관계가 있음을 전제로 스스로의 마음속 어둠을 외부로 투사시키는 악인들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로 바뀌었다. 미야베 미유키 특유의 선한 의지에 대한 따뜻한 믿음을 놓지 않는 동시에 현대의 사회적 규약이 채 갖춰지지 않은 시기에 더 흉악하고 잔인하고 원시적이었던 폭력을 격렬하게 그려낸다.
에도시대라는 낯선 시공간에 대한 머뭇거림만 독서 초반에 극복할 수 있다면, 걸출한 이야기꾼이 펼쳐내는 수백 년 전 인간군상의 풍성한 디테일과 범죄의 거대한 연대기를 맛깔나게 음미할 수 있다. <외딴 집> <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 <흑백> <맏물 이야기> 등 공포와 미스터리의 희비극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재능을 놓치지 마시길.
<김용언 <미스테리아>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