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지인들과의 술자리에서 우연히 화제가 되었던 두 종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하나는 식민지 시대 경성의 여성 공산주의자들의 삶을 다룬 <세 여자>라는 소설이고, 다른 하나는 작가 황석영의 <수인>이라는 자전이다. 전자는 이리저리 알려져 있는 사실들에 허구를 덧붙인 것이고, 후자는 스스로의 삶을 돌이켜보는 회고록이니 분명히 장르가 다르다. 그러나 어차피 모든 팩트는 화자나 관찰자의 상상력과 해석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법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항간에 떠도는 가짜뉴스와 이른바 공영방송의 더없이 신실해 보이는 앵커가 읽어주는 뉴스 사이에 별반 차이가 없음이 낱낱이 밝혀지는 요즈음이라면, 진실과 허구의 거리는 얼핏 생각하듯 그리 멀지 않음을 굳이 자세히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두 책을 읽으며 하나로 수렴되는 교훈을 얻었다. 이를테면 서구형 미모의 흑백사진 속 인물로 기억되는, 박헌영의 아내이자 비련의 생애를 살다 간 공산주의자 주세죽이 막상 극한적 실존 상황에서 “오, 주여”를 되뇌곤 한다는 설정에서 나는 하나의 논리로만 꿰어낼 수 없는 삶의 총체성을 생각했다. 감방에서의 독서는 소통이 없는 관념에 지나지 않으니 제대로 된 독서가 아니며, 독방에서 다독한 정치범들이 보이는 “관념적이거나 사상가연하거나 신비주의적 경향”이 결국은 “감옥 후유증의 일종”이라는 황석영의 통찰에서는 바로 그 삶의 총체성에서 유리되는 지식의 무력함, 나아가 위험성을 엿본다.
그런데 복잡다단한 삶을 한 칼에 자르는 논리로 설명하려는 것이 반드시 관념적 지식인의 전유물은 아니다. 온갖 팩트와 허구가 뒤섞인 정보가 자유롭게 흘러 다니는 세상에서 지식인과 비지식인, 전문가와 대중의 경계는 분명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전문지식의 공공적 활용과 패거리적 엘리트주의, 집단지성과 대중영합 사이의 경계마저도 흐릿해지며, 하나가 다른 하나를 아슬아슬하게 위협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엘리트’는 때로 대중을 근거 없이 폄하하다가도 때로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대중을 이용하거나 동원한다. 대중은 ‘엘리트’가 지닌 허영과 그릇된 지식을 깨우치기도 하지만, 때로는 전문가의 고유 영역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사태를 돌이킬 수 없이 악화시키기도 한다.
지금도 인터넷에서 쉽게 검색되는 한 장의 사진, 즉 ‘엘리트’ 출신 전직 국정원장이 빨간 모자에 선글라스를 낀 노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법원에 나오는 장면은 블랙리스트니 뭐니 하는 온갖 방법으로 반대세력을 옥죄고자 했던 이들의 의식수준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 사진이 대중과 엘리트의 나쁜 예라면, 바람직한 모델로는 이미 오래 전 황우석 교수 스캔들 당시 정치적 이해관계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전문가집단으로서의 브릭(bric: 생물학연구정보센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문제일수록, 식상할 정도로 얘기되곤 하는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의 화해니 공존이니 하는 명제보다는 대중에 의한 전문가적 지성의 공공적이고 민주주의적인 통제, 그 아슬아슬한 균형을 어떻게 달성하는가가 훨씬 더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한편으로는 모든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양식 있는 판단을 내릴 수 있으며 그에 대해 책임을 지는 전문가의 존재. 이러한 균형을 어떻게 만들어나갈 것인가가 한국 사회가 다시 맞은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발전이 가능한지를 판단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류동민 충남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