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득주도성장에 관한 불편한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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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소득주도성장에 관한 불편한 진실

80% 박스권에 갇혀 있다는 농담이 나올 지경으로 대통령의 지지율이 높게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이제 서서히 정권의 실질적 성과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할 것이고, 그래서 소득주도성장은 관심의 초점이 된다. 일부 보수적 경제학자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소득주도성장이 ‘족보 없는’ 이론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몇 가지 사항은 짚어 둘 필요가 있을 듯하다.

첫째, 소득주도라는 말의 모호함이다. 케인스나 칼레츠키에 근거를 두는 경제학 이론의 원래 명칭은 임금주도성장이다. 요컨대 임금과 이윤으로의 분배가 성장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장 그 자체에 영향을 미치는 독립변수라는 주장이다. 자영업자의 비중이 여전히 전체 취업자의 30%에 이른다는 한국적 특수성, 그리고 아마도 임금만을 강조할 때 예견되는 색깔론 비슷한 반발 등을 감안하면 소득주도성장이 무난하기는 하다. 그러나 소득은 예를 들어 임대소득이나 배당소득도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소득’ 주도 성장을 강조함으로써 발생하는 부수적 피해는 노동소득만 소득이냐는 정치공세에서부터 성장을 해야 소득이 증가하는 것인데 웬 동어반복이냐는 제법 학문적 외양을 띤 반격 같은 것들이다. 이미 여기저기에서 시작되는 조짐이 보인다. 둘째, 과연 자산격차보다 소득격차가 더 심각한 문제인가라는 논점이 있다. 피케티가 <21세기 자본>에서 분석한 이른바 신자유주의 시대 미국의 상황을 보면, 실상 최상위 소득자들의 노동소득과 하위 계층의 노동소득은 생각보다는 크게 벌어지지 않았다. 엄청난 소득불평등의 상당 부분이 자산소득의 격차 때문이었던 것이다. 사실 한국에서는 자산격차보다는 소득격차가 크다는 주장이 논리적 근거 없이 발표된 바 있는데(장하성, <한국자본주의>), 별로 주목받지 않는 사이에 그것은 현실정치의 힘을 업으면서 정설처럼 굳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도대체 정확한 현실은 무엇인지부터 냉철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진단이 다르면 정책도 효과도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제대로 된 복지를 위해서는 지금보다 세금을 더 많이 내야 하는 바, 그 더 많이 내는 기준선의 소득은 통상 생각하는 것보다 꽤 낮은 수준이라는 것이다. 세금 많이 거둬 복지하자는 말에 누구나 동의하지만, 막상 자신의 월급봉투가 얇아지는 것을 견디기는 쉽지 않다. 마치 닭과 달걀의 문제처럼, 복지의 기억을 만들어내야 조세저항도 없어질 텐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세금을 더 내야 하는 것이다.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창조경제론은 나름대로 출구전략을 준비했을 수 있다. 애초부터 실체 그 자체가 모호했기 때문이다. 실체가 모호하면 성과를 확인하기도 모호해진다. 그런데 소득주도성장론은 최저임금 인상에서부터 기득권 세력의 이해관계를 건드리는 훨씬 더 구체적인 조치를 수반하고 있다. 소득보다는 성장에 방점이 찍힌 것으로 점차 옮아가는 것은 정치의 속성상 어느 정도는 불가피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장보다는 소득이라는 관점, 즉 더 이상의 분배 악화는 성장에도 짐이 된다는 인식에 있다고 볼 때, 소득주도성장론이 성장에 대한 입증책임을 지게 되는 것은 걱정스러운 일이다. 나는 지금 정치공학적인 우려를 하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이번이야말로 한국 경제가 성장 패러다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텐데, 소득주도성장론이 별다른 성과 없이 덤터기만 쓴다면, 정치적 민주주의가 그랬듯이 어느새 반동의 국면이 닥칠 수도 있음을 저어하는 것이다.

<류동민 충남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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