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영화 ‘택시운전사’가 화제가 되면서 독일의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그는 외신기자 중 가장 먼저 광주에 들어가서 취재 후 우여곡절 끝에 필름을 국외로 보냈고, 다시 목숨을 걸고 광주에 들어가서 계엄군이 물러간 평화로운 광주 시내의 모습을 담았다. 그가 남긴 영상은 광주 민주화운동이 폭도들에 의한 만행이고 광주 시내가 아비규환 상태여서 진압할 수밖에 없었다는 계엄군의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명백한 증거로 작용하였다. 군홧발에 언론이 짓밟혀 광주 밖에서는 아무도 광주의 비극을 알 수 없었을 때, 역사의 진실을 기록하려는 그의 용기 덕분에 우리는 진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우리 독일인이 2차 대전 때 했던 만행을 기억하는 만큼 5·18도 반드시 기억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무거운 책임을 동반한다. 많은 언론인들이 모범으로 삼았던 리영희 선생은 한국 현대사의 모순들을 온몸으로 겪어내며 이를 기록함으로써 언론인의 역사적 책임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그 결과 선생의 삶은 화려한 영광보다는 탄압과 투옥, 강제해직 등 온갖 고난으로 점철되었다.
그러나 지난 8월 초 시사주간지 <시사인>에 보도된 기사는 언론인의 역사적 책임이 이제 헌신짝처럼 버려졌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줬다. 언론사 간부들이 당시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차장(사장)에게 보낸 청탁성 문자메시지가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신문사 운영이 어려우니 광고비 지원을 더 해달라는 부탁, 사외이사 한 자리 줄 수 없겠느냐는 요청, 아들이 삼성전자 입사시험에 지원했는데 꼭 취업되게 해달라는 청탁, 삼성의 면세점 사업을 언론이 어떻게 도와주면 되겠느냐고 물어보는 문자 등이었다. 읽는 사람의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의 비굴함과 몰염치였다. 삼성공화국이라는 말이 빈말이 아니었으며, 삼성 같은 재벌이 언론을 얼마나 우습게 여길지 알 만했다. 이재용의 재판에 명백한 증거가 수없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언론들이 왜 삼성 편에서 기사를 작성했는지 그 속내가 너무나 뻔히 들여다 보였다.
정권의 언론 길들이기는 역사가 제법 길지만 ‘이명박근혜 정권’에서 극에 달했다. 이명박 정권의 측근이던 김재철씨가 MBC 사장으로 취임한 이후 시사 프로그램이 폐지되고 정권 옹호 방송이 증가했으며, 보복성 인사가 늘어났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기자들이 해고되기도 했다. 박근혜 정권에서는 더 강력한 언론 통제가 이어졌다. 청와대에서 언론의 보도방향과 기조에 대한 지침이 하달되었고, 세월호 참사처럼 정권에 불리한 내용들은 보도 통제가 이루어졌다.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인에 대한 부당한 해고는 계속 이어졌으며, 언론의 비판적 기능은 거의 소멸되다시피 했다. 물론 언론 길들이기에 저항한 기자들도 소수지만 존재한다. 하지만 이번 보도로 드러난 언론사 간부들의 행태는 지난 정권의 언론 길들이기의 결과가 어떠했는지, 우리 사회가 자정 능력과 윤리가 실종된 천민자본주의 사회로 완전히 고착되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언론인 후배들이 염치와 윤리를 모두 다 버리고 재벌과 정권이라는 권력 앞에 아양을 떠는 모습을 보면서 리영희 선생은 어떻게 느끼실까? 힌츠페터 기자는 또 어떻게 느끼실까? 마침 두 분 모두 5·18 묘역에 가까이 누워 계신다. 역사를 기록하는 언론인의 책임감이 남달랐던 두 분의 염려와 한탄 소리가 여름날 천둥소리처럼 가까이서 들리는 듯하다.
<이상헌 녹색전환연구소장, 한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