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갱이’ 증오정치의 적폐 청산은 언제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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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 증오정치는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질서를 정초하고 유지시킨 핵심 기제 중 하나였다. 1980년 ‘5월 광주’도 희생양으로 바쳐졌다. 87년 민주화도 빨갱이 증오정치의 강렬한 구심력을 크게 약화시키지 못했다.

2017년 2월 25일 태극기와 성조기가 넘실거리는 ‘태극기집회’ 현장에서 한 여성에 대한 집단 린치가 벌어졌다. ‘노란 리본’을 달고 있거나 태극기 또는 성조기를 들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가해진 폭력이었다. 한 언론의 밀착 취재기는 이를 ‘빨갱이 사냥’으로 묘사했다. “나라가 위급한 상황인데” “문재인과 야당을 옹호하는 발언을 했”으니 “저런 간첩은 죽여도 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국회, 민주노총, 전교조, 언론을 주적으로 삼고 ‘빨갱이는 죽여도 좋다’는 플랭카드가 등장했던 집회 현장이라 기사의 선정성에 대한 비판보다 선정적인 현실에 대한 공포가 성큼 다가왔다.

한 작자가 태극기와 성조기, ‘빨갱이는 죽여도 돼’가 새겨진 십자가 방패를 들고 태극기집회 현장을 설치고 다니며 극우 정치인·언론인과 포즈를 취한 사진을 볼 때만 해도 ’설마’했다. 광화문광장에서 단식 중이던 세월호 유족들 앞에서 일베 회원들과 초코바를 먹으며 유족들의 단식투쟁을 조롱하기도 했다. 그런 자들도, 그 옆에 섰던 자들도 비정상이고 예외라 치부하고 싶었다. 그러나 집회 현장에서는 문재인·야당·세월호·민주노총·전교조·언론 등을 종북 또는 빨갱이로 몰고, 이에 대한 증오(또는 혐오)를 선동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빨갱이 낙인과 비인간화는 박근혜 지키기의 명분으로 권위화되었고 일상화되었다. 비정상과 예외가 일상화되었던 그 시간, 장소에서 집단폭력이 자행된 것은 예견된 일이 아니었을까?

조선총독부 치안본부가 작성한 공산주의자 이재유의 신상기록 카드. 이재유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돼 1930년 11월 5일에 경성지방법원에서 3년 6개월을 선고받은 뒤 만기 출소, 1936년 다시 체포됐다. 고문을 동반한 전향을 요구받았으나 거부해 1942년 형기가 만료돼도 출소하지 못하고, 1944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다. 1930년대부터 본격화된 공산주의자에 대한 체계적 관리와 전향 요구의 사례를 보여준다.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조선총독부 치안본부가 작성한 공산주의자 이재유의 신상기록 카드. 이재유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돼 1930년 11월 5일에 경성지방법원에서 3년 6개월을 선고받은 뒤 만기 출소, 1936년 다시 체포됐다. 고문을 동반한 전향을 요구받았으나 거부해 1942년 형기가 만료돼도 출소하지 못하고, 1944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다. 1930년대부터 본격화된 공산주의자에 대한 체계적 관리와 전향 요구의 사례를 보여준다.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일제 때부터 지금까지 사상의 문제와 결부

빨갱이는 일제 시기의 ‘아카’(アカ)라는 용어에서 유래했다. 둘 다 사람의 속성을 ‘빨강’(赤)이라는 색깔로 지시한다. 이 색깔은 ‘주의자’(主義者), 더 좁게는 공산주의자를 속되게 가리키지만, 그것에 한정되지 않고 의미가 완전히 열린 채 부정적 낙인으로 기능한다.

빨갱이의 일차적 의미는 일제 때부터 지금까지도 사람의 마음속에 위치한 ‘사상’이라는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한국 사회는 언제부터인가 ‘사상’ 단어 자체를 문제시하고 금기시해 왔다. (바로 그랬기 때문에 반대로 이 단어를 복권하고 신성한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도 있다.) 1948년 제헌헌법 제정 때 ‘마음속 자유’에 속하는 신앙, 양심의 자유에 관한 규정(제12조)을 둘러싼 논쟁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양심의 자유와 함께 사상의 자유를 구분해 명기해야 한다는 조봉암, 서용길 의원의 제안(수정안)에 대해 사상을 구별해 넣으면 “김일성 만세, 스탈린 만세” 식 반국가사상 및 행동이 판칠 것이라는 반대 토론이 여기저기에서 제기되었다. 어떤 사상인지 그 내용과 상관없이 ‘사상’은 무조건 38선 너머의 북한과 그 배후의 소련과 내통하는 ‘적색사상’을 의미했다.

사상은 불온하고 위험한 것이 되었다. 사상을 통제하고 처벌하는 국가보안법 체제가 성립되었다. 헌법상 보장되는 ‘결사’나 ‘집단구성’이라 하더라도, 당국이 그 구성원 개개인의 마음속에 있는 결사의 목적에 사상의 흔적이 있다고 판단하면 처벌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상에 대한 이러한 우려와 의심, 처벌이야말로 ‘빨갱이’를 양산했다.

이렇게 사상을 문제 삼아 빨갱이(赤)를 적(敵)으로 만들고 통제하는 법체제의 기원은 일제 치안유지법 체제다. 1925년 일제는 “봇물처럼 터져버린 사상 악화의 흐름”을 막고자 무정부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조선 독립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사상을 ‘위험사상’으로 처벌하는 치안유지법을 만들었다. 1928년에는 이 법을 개정해 이 사상을 배경으로 하는 모든 행위(목적 기도+실행)를 극형으로 처벌하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사상 통제당국의 권력이 급격히 커졌고, 오늘날 공안검사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사상(계)검사’가 탄생했다. 아울러 ‘사상범’이라는 새로운 종족도 탄생했다. 1928년 5월 사상검사의 업무를 정하는 규정에서 ‘사상범’ 용어가 공식으로 처음 등장했다. 사상을 배경으로 한다는 제한이 있지만, 누가 사상범인지는 사상검사의 판단과 결정에 달렸고, 사상범의 정의는 열려 버렸다. 누구든 이에 포함될 수 있는 것, 그래서 그것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자에게 권력이 있는 것이다.

‘적화’ 공포를 적극 조장한 일제 사상검찰

사상범 용어는 곧 공식 행정문서뿐 아니라 언론에서, 일상에서 범람했다. 치안유지법 체제의 운용은 사상범을 양산시켰고, 사상범 처리는 시급히 해결해야 할 사회문제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시도된 것이 ‘전향’(轉向)과 ‘갱생’(更生)이었다. 1928년 이래 전향 정책은 일본과 식민지 사상 통제당국의 지지를 받고 연착륙했다. 엄벌뿐 아니라 사상범을 특별히 꼬드기고 돌아서게 하는 권력기술이 만들어졌다. 당국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일본 사회에 오래된 갱생의 전통을 활용해 전향한 적을 다시 태어나도록 포용(포섭)하겠다고 나섰다.

“악한 사상에는 바른 사상에 의해서 대처하는 것이 제일이며, 사상전에 있어 국가의 최후 무기는 ‘사랑’”이라는 말이 설파되었다. ‘천황’을 정점으로 국가와 ‘이에’(家)가 유기적으로 작동하는 일본에서 이 말은 정서를 파고들었고 꽤 강력했다. 사상범이기에 앞서 일본인이기 때문에 국가의 “엄부자모(嚴父慈母)적 사랑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인이 아닌 식민지인 사상범이라면 어떻게 되는가? 식민지 조선인 사상범의 배경은 조선 독립 사상이기 때문에 사랑으로 갱생되지 않는다고 조선총독부 당국이 생각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전향 정책을 추진했지만, 조선인 사상범에 대한 엄벌 방침을 쉽사리 포기하지 않았다.

적어도 1935년까지는 일본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전향 다음 수순이 갱생이고, 갱생이 이루어져야 전향이 더 확고해질 터였지만, 갱생의 제도화는 부진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막대한 권력이 사상 통제기구, 특히 사상검찰로 쏠리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전향에서 갱생으로 이어지는 국가 사업은 국가가 사회를 보호한다는 그럴 듯한 명분을 가지고 ‘지배의 전사회화’를 시도하는 것이었는데, 이를 사상검찰이 주도하면 그렇지 않아도 힘이 센 ‘검벌’(檢閥)이 더 강력해지기 때문이다.

이 견제에 대해 사상검찰은 ‘적화’(赤化) 공포를 적극 조장했다. ‘주의자’들이 1935년 제7차 코민테른의 ‘반파쇼 인민전선’ 방침에 입각해 합법 영역으로 침투했고, 심지어 사상범 보호단체와 우익단체에까지 스며들고 있다고 선전했다. 한 사상검사는 “공산주의자가 합법적으로 대중을 빨아들이려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자유주의는 공산주의의 온상”이라는 생각이 팽배해졌다.

1935∼36년이 지나면서 ‘아카’(赤)라는 적(敵)이 만들어졌다. 과거 용법과 달리 ‘주의자’에 강조점이 있지 않고, 이들이 합법 영역으로 “침투하고 섞여버려 구별할 수 없다”는 인식이 투영되었다. ‘아카’는 더 이상 정의될 수 있는 용어라기보다 부정적인 낙인의 정치가 되었다. 무정부주의자,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뿐 아니라 반전주의자, 평화주의자, 자유주의자 등도 ‘아카’의 낙인을 피하지 못했다.

내부의 적을 만들어 '빨갱이'로 규정하고 체계적으로 배제하려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1989년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세계에 알리던 인권운동가 패리스 하비 목사 추방 요구 시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위)와 2017년 2월 탄핵 선고를 반대하는 집회 영상화면(아래). / 나라사랑TV

내부의 적을 만들어 '빨갱이'로 규정하고 체계적으로 배제하려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1989년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세계에 알리던 인권운동가 패리스 하비 목사 추방 요구 시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위)와 2017년 2월 탄핵 선고를 반대하는 집회 영상화면(아래). / 나라사랑TV

2008년 이후에도 계속된 ‘종북몰이’

사상검사들은 사상범을 전향과 갱생의 기준, 즉 세분화된 표준에 따라 구분했다. 전향·준전향·비전향을 구분했고, 갱생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여러 단계를 설정했다. 포섭을 거부하는 아카(비전향자)는 예방구금을 통해 격리시키는 방식으로 배제했다. 아시아·태평양전쟁 말기에는 이들에 대해 ‘배제’와 ‘박멸’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기도 했다.

이것이 실제 아카로 낙인된 조선인 비전향자들을 죽음으로 동원했던 것은 아니지만, 조선이 전장화될 것에 대비한 학살 계획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45년 4월 초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일선 경찰서에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 ‘요시찰인’(要視察人)을 예비검속하고 “적당한 방법으로 처치”하라고 지시했다.

이 지시는 미수로 그쳤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유예되었을 뿐이다. ‘제주 4·3사건’ 이후 “제주도에 거주하는 사람은 전부 빨갱이”로 몰렸다. ‘여순사건’ 직후에는 빨갱이가 “잔인무도하고 천인공노할 귀축, 짐승, 마귀”로 비인간화·악마화되었고, ‘손가락총’으로 낙인되면 학살되었다. 지역(민) 자체가 죽여도 되고, 죽여야만 하는 빨갱이로 호명되었고, 이는 ‘반공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의 구심력으로 작동했다. 절멸해야 할 절대적 적을 호명하는 빨갱이 증오정치는 한국전쟁 때 절정에 달했다. ‘보도연맹 사건’은 그런 맥락에서 발생한 자국민 대량학살 사건이었다.

빨갱이 증오정치는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질서를 정초하고 유지시킨 핵심 기제 중 하나였다. 1980년 ‘5월 광주’도 희생양으로 바쳐졌다. 87년 민주화도 빨갱이 증오정치의 강렬한 구심력을 크게 약화시키지 못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수준에서 증오정치의 피비린내 나는 결과들에 대해 겨우 입을 떼었고, 이 말을 들어줄 ‘귀’가 생겨났을 뿐이다.

“비 더 레즈(be the reds)”와 “오 필승 코리아” 구호와 함성이 한국의 광장과 골목, 길을 꽉 메웠던 2002년, 빨갱이 증오정치가 이제 정말 냉전 박물관에 진열된 무기로 전락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었던 적이 있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2008년 이후 9년 내내 대대적인 ‘종북몰이’가 계속되었다. 신종 빨갱이 증오정치가 유령처럼 활개쳤다. 여기저기 빨갱이 감별사들도 등장했다. “자나 깨나 나라 걱정만 하는 애국자” 고영주는 그 중에서도 최고였다. 친북 반국가행위 인명사전도 편찬했고, 전교조도 ‘이적단체’로 몰았으며, 통합진보당 해산에도 큰 공을 세웠다. 백미는 감별 주특기를 잘 살려 문재인 대통령 후보를 공산주의자로 몰이한 것이었다.

2017년 초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는 촛불이 타오르던 광화문광장 저편에서 ‘태극기집회’가 연이어 열리고, 빨갱이는 죽여도 좋다는 선동과 집단폭력이 발생했다. 짧게는 9년 동안, 길게는 반세기 작동한 빨갱이 증오정치의 결과가, 퇴적된 지층들이 마치 단층작용처럼 튀어나온 것이다.

대한민국의 겨울을 환하게 밝힌 촛불은 과연 빨갱이 증오정치의 적폐를 청산할 수 있을까? 빨갱이 증오를 법적·제도적으로 규제하고, 담론적으로도 맞받아치고 전복하고 해체할 수 있는 날이 오게 될까?

<강성현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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