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쁨이 미덕인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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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바쁨이 미덕인 사회

“식사 하셨어요?”가 인사말처럼 쓰이던 시절이 있었다. 먹는 일이 사는 데 절대적으로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던 가난한 시절의 모습이었다. “먹고 살기 힘들다”며 유독 먹는 일을 강조해서 말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경제성장으로 먹고 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자 언제부턴가 “요즘 많이 바쁘시죠?”가 인사말처럼 쓰이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연락이 닿아 서로의 근황조차 잘 모르는 처지임에도 다짜고짜 “요즘 많이 바쁘시죠?”라고 물으며 말문을 여는 것이 마치 새로운 대화 예절처럼 자리 잡았다.

대체 왜 이런 인사법이 생겼을까? 아마도 한창 경제가 성장하던 시기에 바쁨은 곧 ‘활력’을 의미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지금처럼 청년실업과 조기 퇴직자가 넘치는 경제 정체기에 바쁨이란 ‘건재’함을 나타내는 상징이기 때문이리라. 바쁨이 상대방의 사회적 능력을 인정하는 찬사이자 동시에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는 표현수단인 것이다. 그래서 삶이 힘들 때조차도 이제는 “바빠 죽겠다”며 악착같이 바쁨을 강조하는 그런 시대가 되어 버렸다.

우리는 늘 바쁘다. 외국인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한국말이 “빨리 빨리”라는 우스갯소리도 이젠 진부하리만큼 익숙해진 지 오래다. 그들의 눈에 비친 한국인이란 언제나 바삐 서두르는 사람들이다. “아침엔 우유 한 잔, 점심엔 패스트푸드, 쫓기는 사람처럼 시곗바늘 보면서”라고 읊은 신해철의 노래 <도시인>이 발표된 것이 1993년인데, 2017년의 상당수 한국인들은 아침에 우유 한 잔 마실 여유도 없이 더욱 바빠졌다. 도시에 사는 한국인들의 걸음 속도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수준이라고 한다. 주말에 강변에서 느긋하게 자전거라도 타러 나가보면 뭐가 그리 급한지 무리를 지어 저돌적으로 질주하는 자전거족들의 기세에 화들짝 위협감을 느끼게 된다. 그들에게는 취미생활마저도 바쁘게 후딱 해치워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과제처럼 여겨진다. 슬로 라이프라는 말이 나오고, 슬로 시티로 지정된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늘고 있다지만 이조차도 느린 삶이란 그저 바쁨이 일상이 되어버린 현실을 잠시 벗어난 일시적 일탈임을 역설적으로 말해줄 뿐이다. 게다가 여전히 더 많은 사람들은 여행을 떠나도 목적지에 도착하면 바삐 인증샷 몇 컷을 찍고는 또 바삐 다음 목적지를 향해 달려간다.

몸만 바쁜 것이 아니라 마음도 바쁘다. 그러니 새 대통령을 뽑아놓고 바로 다음날부터 차기 대통령 감을 논하는 것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게 받아들여진다. 외국에서 깜짝 놀랄 만한 신기술이나 신제품이 나오면 “우리는 그동안 뭐 했냐?”고 다그치며 서둘러 대책기구를 꾸리고, 예산을 편성하고, 한국형 모델을 제시하기에 바쁘다. 법률 제정이나 정책적 의사결정도 속전속결로 바쁘게 처리해야 시원하게 일 잘한다는 소리를 듣는다. 꼼꼼히 점검하고 차분하게 공론을 수렴할 여유 따위는 허용할 틈이 없다. 이렇게 바쁨이 강조되는 풍조는 수단과 목적이 뒤바뀐 비정상적 사회의 단면이다.

잘 살기 위해 부득이 바쁠 수는 있겠다. 하지만 바쁨 그 자체가 잘 살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처럼 사용되다 보면, 결국 바쁘기 위해 사는 것 같은 목적전치 현상이 일어난다. 지금 우리 사회가 딱 그 모양이다. 바쁨이 자산이고 미덕이 되면 불행도 바삐 오게 마련이다. 시간에 쫓겨 허덕이며 살다가 시간에 밀려 허무하게 사라지는 인생이야말로 가장 비극적이지 않겠는가?

<민경배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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