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새로운 산업혁명, 중산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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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중서부를 대표하는 도시라면 단연 시카고와 디트로이트를 꼽을 수 있다. 이 중 디트로이트는 일명 자동차의 도시로 20세기 초·중반 미국의 산업혁명을 견인하던 도시였다. 쉽게 생각하면 20세기의 실리콘밸리였다. 그 덕분에 디트로이트 시내에서 30분 정도 떨어져 있는 앤아버라는 소도시에 있는 미시간대도 세계적인 대학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디트로이트는 2013년 파산 신고를 하는 파국을 맞이했다. 무인 자동차 등을 통해서 새로운 도약을 꿈꾸고 있기는 하나, 시내 곳곳에 과거 거대 공장의 폐허가 있는 디트로이트는 부풀어오르는 미래의 기대보다는 주저앉은 과거의 영광이 더 선명하게 보이는 곳이다. 이건 비슷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다른 미국 중서부 도시도 마찬가지다. 자동차, 철강 등 한때 미국이 세계를 주도하던 산업이 주춤하자 이들 산업에 기대어 성장했던 지역경제와 사회도 피폐해졌다.

현재 미국 경제를 이끌어 가는 곳은 서부라고 할 수 있다. 서부 시애틀에 있는 마이크로소프트 레드먼드 캠퍼스./마이크로소프트

현재 미국 경제를 이끌어 가는 곳은 서부라고 할 수 있다. 서부 시애틀에 있는 마이크로소프트 레드먼드 캠퍼스./마이크로소프트

현재 미국 경제를 이끌어 가고 있는 건 서부로, 캘리포니아 남단의 샌디에이고부터 워싱턴주 북단의 시애틀에 이르는 이 지역의 각종 첨단산업이 도약하고 있다. 시애틀에는 마이크로소프트와 아마존 본사가 있고, 항공산업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이제 실리콘밸리는 그 본처인 산타클라라 밸리(샌프란시스코 남쪽)를 넘어서서 샌프란시스코 항만지역 전체로 확대돼 있다. 여기에서는 컴퓨터·통신산업만 발달한 게 아니고, 소비재, 에너지, 의료 등 거의 모든 종류의 혁신을 다 볼 수 있다. 남쪽으로 내려가면 빛의 도시, 전 세계 엔터테인먼트의 핵인 LA, 그 밑에는 남부 휴양도시이고, 퀄컴의 본사가 있으며, 미국 해군의 요충지인 샌디에이고가 있다. 나아가 캘리포니아는 미국 최대의 농업 생산지대이기도 하다. 1차산업부터 4차산업까지 세계 최고 스펙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캘리포니아주 자체만으로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큰 경제단위로 미국, 중국, 일본, 독일, 영국 다음이다.

하지만 혁신의 기수가 단순히 동부에서 서부로만 옮겨간 것은 아니다. 크게 두 가지 점에서 다르다. 첫 번째는 사실 서부라는 말 자체가 정확하지 않다. 중서부는 주로 뉴욕에서 유입된 유럽계(독일, 아일랜드, 이탈리아 등) 이민자들이 서쪽으로 진출하면서 개척된 지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확히 보면 사실 미국 대륙 내에서 서쪽보다는 동쪽에 더 가까운데도 중서부라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서부는 동쪽에서는 동양계 이민자들, 남쪽에서는 스페인 식민세력(멕시코), 북쪽으로는 영국·프랑스 식민세력(캐나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유럽계 미국 이민자들이 함께 세운 곳이다. 딱 ‘서’부라고 이야기하기가 애매한 곳으로, 지금도 그러한 역동적인 현재진행형의 이민 역사가 다양한 인종 배경으로 잘 드러나 있다.

마지막으로 서부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미국의 새로운 산업혁명에는 중산층이 없다. 캘리포니아주는 미국 내에서 가장 인종적으로 다양한 주인 동시에 가장 불평등이 심한 곳이기도 하다. 뉴욕의 맨해튼과 비슷한 샌프란시스코의 살인적 지가와 물가는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나, 주택난은 샌프란시스코뿐 아니라 캘리포니아주 전체의 문제다. 현재 캘리포니아주의 가장 심각한 정치적 이슈다. 이런 배경에서 볼 때, 샌프란시스코 일대에서 실리콘밸리를 흑인과 라티노만 없는 유엔이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뼈없는 말은 아니다.

<김재연 (UC 버클리 정치학과 박사과정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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