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가습기 참사, 국가의 책임은 전혀 없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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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 살균제는 단지 회사와 소비자 간의 문제라는 입장에서, 국가 자신의 책임은 전혀 없으며, 국가가 제공하는 모든 조치는 회사로부터 구상되어야 한다는 행정적 단서를 달아 구제의 범위와 내용을 제한하고 있는 제도이다.

한 사건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규명은 주어진 사건의 원인을 파악하고, 이러한 원인이 초래된 혹은 비롯된 의도 혹은 배경에 대한 주변 정황을 파악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즉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직접적이고 단기적인 원인을 파악하고, 한편 그러한 원인이 비롯된 배경에서 제시되는 보다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의도의 존재 여부와 그 형성을 판단하는 일이다.

지금까지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사망과 관련하여 제시될 수 있는 여러 원인들 중 단지 일부만이 사법적으로 인정되어 그에 따른 책임이 거론되었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넓은 개념으로 바라본다면, 훨씬 많은 지점에서 서로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다는 점이 주목되어야 한다. 참사가 발생하기까지, 그리고 발생한 이후 수습하기까지의 지난한 과정 중에 정부가 담당하던 혹은 담당할 수 있었던 역할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크게 보아 다음 네 가지 활동이 필요하다. 질병 및 재해와 그에 기여할 수 있는 통제 가능한 원인들에 대한 자료의 수집활동, 이미 알려진 기준에 비추어 모아진 자료의 의미에 대한 정리·평가활동, 기존에 알려진 양상이나 통제를 벗어난 상황 등의 문제들에 대한 평가 및 인과관계 규명활동, 그리고 마지막으로 밝혀지는 문제의 직접적 혹은 근본적 원인들에 대한 대처 및 관리활동이 보건학의 네 가지 기본 영역이다.

2013년 1월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이 서울 삼청동에 있는 박근혜 대통령 당선자의 인수위원회 앞에서 정부의 책임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 환경보건시민센터 제공

2013년 1월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이 서울 삼청동에 있는 박근혜 대통령 당선자의 인수위원회 앞에서 정부의 책임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 환경보건시민센터 제공

환경부 ‘유독물에 해당 안됨’으로 판단

생활환경 중에 사용되는 화학물질과 관련하여 정부가 제대로 된 공중보건체계를 갖추고 그에 필요한 역할을 바람직하게 다하고자 하였다면, 앞서 언급한 정보수집, 자료정리, 문제 규명, 그리고 대처 및 관리에 나서는 활동들이 이루어졌어야 한다. 대표적으로는 독성정보센터와 같은 신고 및 자료수집 기능, 환경보건센터와 같은 알려진 환경문제의 정보 평가 및 리소스 기능, 가습기 살균제 피해판정기구와 같은 조사 및 평가체계 기능, 그리고 환경피해 구제제도와 같은 문제 대처 및 관리기능 등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연결되었어야 한다. 이러한 기능들 중의 일부가 지난 2011년 이후 조금씩 만들어지거나 보완·연계되는 과정을 지나 왔다. 그러나 많은 부분은 아직도 제대로 채워지지 않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국가의 책임을 물을 수 있다.

한편 화학물질 관리 및 허가제도, 제품 모니터링 제도, 조사 및 평가에 관한 제도, 그리고 구제제도 등을 갖추고 제대로 운영하지 못한 것에서 참사에 대한 정부의 원칙적 책임을 전반적으로 물을 수도 있지만, 보다 현실적인 측면에서 바라보았을 때 가습기 살균제 제품이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국가가 화학물질 관리와 허가에 대한 제도, 그리고 환경분쟁 조정제도를 운영하여 왔다는 점에서 이 두 지점에서 가습기 살균제 피해에 대한 국가 책임을 반드시 묻고 지나가야 한다.

국가의 화학물질 유해성 심사 및 평가와 관련하여 1996년 ㈜유공이 제출한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의 제조와 관련한 신규물질 등록 신청과 관련해 1997년 환경부가 ‘유독물에 해당 안됨’으로 판단했다. 이 결정은 화학물질에 대한 독성정보는 전혀 없는 상태에서 단지 해당 물질이 고분자물질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크로마토그라프 분석 결과와 비점, 용해도, 수평균분자량, 잔류단량체 함량 등에 근거하여 내린 판단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은 당시 화학물질 관리제도를 갖춘 국가들에서 적용하고 있던 고분자물질에 대한 관리 및 허가의 기준과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2013년 7월 5일 오전 윤성규 당시 환경부 장관이 정부서울청사 별관 브리핑룸에서 ‘기업과 정부가 함께 하는 맞춤형 화학물질 안전관리 종합대책’을 발표하고 있다. / 연합뉴스

2013년 7월 5일 오전 윤성규 당시 환경부 장관이 정부서울청사 별관 브리핑룸에서 ‘기업과 정부가 함께 하는 맞춤형 화학물질 안전관리 종합대책’을 발표하고 있다. / 연합뉴스

환경분쟁 조정 역할 제대로 했나

미국은 1995년 유해물질관리법을 개정하면서 고분자물질(polymer)들 중 유해성 심사가 면제되는 Polymer of Low Concern(PLC)의 기준을 마련했다. 한국도 이 법안을 참고해 고분자물질에 대한 심사 면제 규정을 마련했다. 그러나 미국의 법안은 분자물질이지만 유해 가능성이 있는 고분자물질은 면제에서 제외하도록 하는 규정이다. 특히 용해도가 크면서 물에 녹아 양이온을 띠게 되는 고분자물질의 경우 높은 세포독성 가능성 때문에 면제 규정에서 제외하도록 한, 즉 제대로 그 유해성에 대한 조사를 하도록 한 규정이다. 이러한 점에서 1997년 당시 환경부의 관리기준은 제대로 다른 나라의 기준을 참고하였더라면 달라져야 했을 기준이며, 그에 따른 국가의 책임 또한 구체적으로 물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환경피해로 인한 손해배상을 구하는 사법적 제도가 따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환경분쟁을 조정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이유는 여러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사법적 판단을 구하기 위해서는 피해를 주장하는 측이 그 피해의 원인에 대한 입증책임을 져야 하지만, 환경으로 인한 피해의 입증이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는 점, 그리고 피해 입증의 사법적 판단이 내려지기 이전이더라도 원인의 가능성에 따라 우선적으로 그 피해를 최소화할 필요가 제기된다는 점 등에서 사법적 판단 이전이라도 행정적으로 문제가 관리되어야 하는 필요성들을 찾을 수 있다. 현재 국가가 운영하고 있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구제는 그 기본적 성격이 배상이나 보상이 아닌 단지 최소한의 지원에 속하는 구제에 머무르는 조치들이며, 이는 환경분쟁 조정과 같은 차원에서 국가의 기본적 역할의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제도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에 있어 마치 가습기 살균제는 단지 회사와 소비자 간의 문제라는 입장에서 국가 자신의 책임은 전혀 없으며, 국가가 제공하는 모든 조치는 회사로부터 구상되어야 한다는 행정적 단서를 달아 구제의 범위와 내용을 제한하고 있는 제도이다. 이는 가습기 살균제 문제 발생에 있어 국가의 책임은 전혀 없다는 잘못된 주장을 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비롯한 환경피해의 문제 해결에 있어 구제는 원인의 가능성에 근거하여 추가적인 피해 악화 방지와 추후 문제제기를 가능하게 하는 최소한의 지원을 제공하여야 하는 국가의 기본적 역할이라는 점을 왜곡하고 있다는 점에서 잘못 적용되고 있는 제도이다. 국가의 역할을 환경피해의 자동적 사법처리 과정의 전 단계만을 담당하는 것에 국한시키는 매우 부적절한 판단이다.

지금이라도 국가 책임 물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가습기 살균제 사건의 발생, 규명, 해결, 및 재발 방지 등과 관련하여 그 문제가 미연에 방지되지 못하고, 또한 발생한 이후에라도 제대로 풀리지 못하고 악화되거나 지연되었던 요인들을 검토하였을 때 그러한 요인들 중의 상당한 부분은 국가의 역할과 관련이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결국 가습기 살균제 사건의 원인과 관련하여 국가의 제대로 된 역할과 그에 따른 책임이 무엇이어야 했는지를 늦게나마 물어야 한다. 설사 모든 원칙적인 면들이 현실에서 고려되지 못할 사정이 있었다 하더라도, 최소한 화학물질 유해성 심사 및 평가와 관련한 국가의 책임, 그리고 환경피해의 구제와 관련한 국가의 책임은 지금이라도 제대로 지적되고 바로잡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국민 보호는 최소한의 국가 책임이다.

가습기 살균제 Q&A | 왜 많은 사람들이 가습기 피해 신고를 하지 않을까

2015년 11월 아내와 아이를 잃은 피해자 안성우씨와 필자가 부산을 출발해 주요 도시를 거치며 서울로 올라오면서 피해자 찾기 및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는 자전거 캠페인을 전개했다. / 최예용 제공

2015년 11월 아내와 아이를 잃은 피해자 안성우씨와 필자가 부산을 출발해 주요 도시를 거치며 서울로 올라오면서 피해자 찾기 및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는 자전거 캠페인을 전개했다. / 최예용 제공

최근 환경부가 학계에 의뢰한 가습기 살균제 피해규모 조사에서 사용자가 350만~400만명이고 사용 후 병원치료를 받은 피해자가 30만~50만명이나 된다는 결과가 발표됐다. 2017년 7월 21일까지 정부에 신고된 피해자가 5678명이니 실제 피해자의 98~99%는 아직 신고되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다. 절대다수의 피해자들이 신고되지 않고 있는 이유를 살펴보자.

첫째, 알면서 신고하지 않은 경우다. 자신이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때 건강피해가 발생해 병원치료를 받았던 일도 알고 있지만 신고하지 않은 경우다. 이런 경우가 많을까? 제법 많을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의 첫 번째 사례는 오래전에 가습기 살균제를 사서 썼다는 증거가 없어서 신고를 하지 않은 경우다. 즉 살균제 제품이 남아있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사서 썼다는 영수증도 없는데 신고가 가능하겠느냐고 여겨서 아예 신고할 생각조차 안하고 있는 경우다. 상당히 많을 것으로 보이고 실제 주변에 물어보면 이런 경우가 많다. 지금부터 치면 짧게는 7년, 최장 23년이나 지난 일이고 당시 3000∼4000원 했던 일회용 제품이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당시 이들의 건강피해가 경증이었나 혹은 중증이었나 하는 것도 중요한 변수다. 경증의 경우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지만 중증의 경우에는 매우 중대한 이야기가 된다. 사망한 경우도 적지 않고 며칠 혹은 오랫동안 병원에 입원할 정도의 치료를 요하는 피해를 입은 경우들이기 때문이다. 심각한 후유증이 이어지거나 합병증이 발생한 경우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매우 안타까운 경우이지만 이들 경우에는 직접적인 사용 증거가 없다 하더라도 훈련된 조사원에 의한 사용조사에서 제품 사용에 관한 일관된 진술이 가능하면 사용한 것으로 인정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오래됐고 일회용 제품이 원인이라는 점을 고려한 조치로 반드시 신고할 겻을 권고한다. 다만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냐’, ‘그런다고 죽은 아이가 살아나느냐’는 생각으로 신고를 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 그동안 사별·이혼·재혼 등의 과정을 겪으면서 신고하기 어려운 여건에 있는 피해자들도 있다. 모두 안타까운 경우들인데, 정부는 이 점을 충분히 고려해 피해자들의 프라이버시를 살리면서 진상을 규명해 이들을 위로하고 제대로 된 대책을 제시해야 한다.

둘째, 몰라서 신고하지 않은 경우다. 필자는 이런 경우가 알면서 신고하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더 많을 것으로 판단한다. 이 사건이 2011년에 발생했고 이후 5년여 동안 언론에서 제법 많이 다뤘지만 피해신고가 얼마 안 되다가 2016년 5∼7월 이 사건이 한국 사회의 최대 이슈로 떠오르고 연일 언론에서 다루는 과정에서 매달 1000명 넘게 피해신고가 줄을 이었으며, 2016년 한 해 동안만 4000명이 넘게 신고했다. 이 사건 자체를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자신과 혹은 가족과 관련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다가 문득 10년 전, 15년 전에 사망했거나 심각한 건강문제로 병원에 입원했던 당시에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했던 적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려 신고하게 된 경우들이다. 이전의 피해자들과 다른 점은 나이가 든 노인층 피해자가 많다는 것인데, 노인들의 경우 여러 가지 지병이 있기 때문에 그동안 가습기 살균제와 연관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늘 옆에 두고 사용하던 생활용품이 사람을 죽이고 폐를 딱딱하게 만들어 숨을 못쉬게 만들 줄 아무도 상상하지도, 경험해보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이 경우에도 경증과 중증피해가 있을 수 있는데, 특히 사망과 같은 중증피해를 찾아내는 데 행정력이 집중되어야 한다.

어떤 경우든 피해자를 최대한 찾아내는 것이 이 사건 진상 규명의 핵심적인 사안이다. 시간이 갈수록 피해자를 찾아내는 일은 어려워지고 영구미제사건으로 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 서둘러야 한다. 또한 신고자들이 구매기록과 병원기록을 제시하는 현재의 절차 자체가 신고를 가로막는 걸림돌인 측면도 크다. 제조·판매사는 자체적인 피해신고센터를 개설하고, 정부는 제품의 구매정보를 파악해 소비자들에게 제공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본인 동의만으로 병원기록을 정부가 대리 조사하는 등의 간소한 절차를 마련해야 한다.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


<백도명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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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 이후 준비해야 할 것들
오늘을 생각한다
탄핵 이후 준비해야 할 것들
밤새 뒤척인다. 겨우내 마음 편히 잠을 자지 못해 머리에 스모그가 낀 듯 무겁다. 창밖을 보니 눈이 내린다. 이상기온이 일상이 돼간다. 기후변화의 징후인 3월 중순 눈 쌓인 풍경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고 불길하다. 자연 시스템의 불안정성만큼이나 정치와 사법 시스템 또한 아슬아슬하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둘러싼 사회적 긴장은 한국 민주주의가 직면한 불안정성을 드러낸다. 일만 년간 이어온 기후 안정성과 40여 년이 채 안 된 한국의 민주주의는 기간으로는 비할 데 아니지만, 우리 삶에 당연히 주어지는 조건으로 여겨졌던 점은 흡사하다. 이번 겨울 기후환경이든 정치체제든,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기후위기와 정치위기라는 무관해 보이는 두 위기는 사실 그 원인 면에서도 맞닿아 있는데, 효율과 성과가 최우선시되는 과정에서 다른 중요한 가치는 간과했다는 점이다. 한국사회는 산업화하는 과정에서 빠르게 성장하는 법을 배웠지만, 화석 연료 중심의 에너지 구조를 전환하는 데 게을렀고, 정치적 다양성과 세대 간의 이해를 구현하지 못했다. 우리는 경쟁을 통해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지만, 이제는 그러한 방식의 성장이 우리 사회를 갉아먹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