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떤 사람인 줄 알 수 있을 만큼 살았다. 그리고 자아도 강해졌다. 당연히 중년엔 “내가 누구인지?“ 혼란스러워야 한다. 지금까지 ‘나’라고 알고 살아왔던 그 모습이 진정 ‘나’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느끼기 때문이다.
남성과 여성을 막론하고 중년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요즘은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요” 혹은 “내가 왜 사는지 모르겠어요”라며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내가 누구인가?” 하는 질문은 우리가 평생 해야 하는 질문 중의 하나이다. 아마 평생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도 풀리지 않는 과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구에서 살아가고 있는 생명체 중에서 유독 인간만이 고민해야 할 과제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고민은 인간임을 증명하는 중요한 근거이기도 할 것이다. 오죽하면 고대 그리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神殿) 현관 기둥에 ‘너 자신을 알라’라는 명구가 새겨져 있었겠는가?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지혜가 신에 비하면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는 입장에서, 무엇보다 먼저 자기의 무지(無知)를 아는 엄격한 철학적 반성이 중요하다고 하여 이 격언을 자신의 철학적 활동의 출발점에 두었다. 그도 아테네의 청년들에게 ‘너 자신을 알아라’라는 명제를 던지면서 스스로 자신의 삶을 반추하게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너 자신을 알라'란 말이 새겨져 있었던 그리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의 2009년 모습. / 위키피디아
거울 속의 내 얼굴은 허상일 뿐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하면서 혼란스러워하는 중년들을 만날 때마다 필자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겪은 몇 가지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교수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필자를 심리학의 세계로 이끌어주신 은사 두 분을 모시고 같이 점심식사를 하였다. 식사를 맛있게 한 후, 한 교수님이 필자에게 “한 선생은 노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하고 물으셨다. 1988년 당시는 전국에서 노동조합이 결성되면서 사회적으로 많은 갈등이 표출될 때였다. 필자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대로 “노조가 필요하지요. 그래야 노동자들도 자신의 정당한 대우를 요구할 수 있지 않겠어요?”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은사님 중 한 분이 걱정스럽다는 듯이 필자를 바라보면서 “이제 보니 한 선생도 빨갱이구먼” 하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 필자는 그날 처음 자신이 ‘빨갱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후에 이번에는 학생대표가 찾아와 필자의 강의를 보이콧하겠다고 통보를 하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라 “왜 내 강의를 안 듣겠다는 것이지?” 하고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그랬더니 학생대표가 “선생님은 골수 미제 앞잡이입니다. 우리는 미제 앞잡이의 강의를 듣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필자는 한 번도 자신이 ‘미제 앞잡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당황스러워하면서 물었다. “왜 내가 미제 앞잡이지?” 그러자 학생대표는 “선생님은 미제 앞잡이가 되는 세 가지 조건을 다 갖추고 계십니다. 그래서 골수 미제 앞잡이입니다”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날 처음 필자는 자신이 ‘미제 앞잡이’인 것을 알았다!
그 후 몇 년이 흐른 뒤, 강의시간에 한 여학생이 “선생님은 여자가 담배 피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을 했다. “남녀를 불문하고 담배는 개개인의 기호에 달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는 되고 여자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여자는 자녀를 잉태하고 생산하는 귀한 몸이니 건강에 각별히 신경을 썼으면 좋겠다”라고 답을 했다. 그 후 그 학생으로부터 메일을 받았다. “교수님은 남녀 차별주의자입니다. 담배 피는 것에 대해 여성에게 더 부정적인 잣대를 적용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그날 내 자신이 ‘남녀 차별주의자’인 것을 처음 알았다.
진정한 ‘나’로 살아야 할 날이 많이 남았다
도대체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아마 우리의 신체 부분 중에 우리를 제일 잘 증명하는 곳은 얼굴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증명사진’을 제출하라고 하면 너나 할 것 없이 얼굴사진을 제출한다. 하지만 그렇게 우리를 잘 증명해주는 얼굴을 ‘직접’ 본 사람이 있을까? 아이로니컬하게도 우리는 한 번도 얼굴을 직접 본 적도 없고, 또 볼 수도 없다. 다만 거울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아가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 거울에 비친 모습 그대로가 진짜 나의 얼굴 모습이라고 의심 없이 믿는다. 그리고 단체사진 중에서 자신이 거울에서 본 친근한 모습을 찾아내 그 사람이 자신이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자신이 ‘예쁘다’는 것은 어떻게 알아낼까?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동화 ‘백설공주’에 그 답이 있다. 백설공주의 계모에게는 마술거울이 있었다. 그리고 이 거울은 항상 사실만을 말했다. 계모가 거울에게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지?”라고 물을 때마다 그 거울은 “그야 물론 왕비님이십니다”라고 대답하곤 했다. 백설공주가 일곱 살이 되던 해의 어느 날, 왕비는 여느 때처럼 자신의 아름다움을 확인 받으려 거울에게 질문을 하지만, 이번에는 거울이 “왕비님도 아름다우시지만, 백설공주가 더 아름답습니다”라고 대답을 한다. 이에 엄청난 질투를 느낀 계모는 백설공주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다.
결국 자신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없고, 더구나 자신이 어떤지를 알 수 없는 인간은 거울에게 자신이 예쁜지의 여부를 물어볼 수밖에 없고, 그 거울의 대답을 통해 자신의 미모에 대한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이 동화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교훈의 확신은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알고 있는 것도 사실은 거울이 우리에게 ‘너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알려준 것들의 집합체에 불과하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이 아닐까?
중년의 여성들이 느끼는 허탈감을 소위 ‘빈둥지 중후군’이라고 부른다. 자녀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신보다는 ‘○○○의 엄마’로 살아가는 데 익숙해지고, 또 그렇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고 여기고 살아가던 여성들이 더 이상 자녀가 어머니의 손길을 간섭으로 여기고 떠나갈 때 느끼는 허전함과 상실감과 당황함의 원인도 결국 좋은 ‘엄마’로 평가받으려 살아왔던 세월이 더 이상 자신의 참모습이 아니고 이제부터는 다시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에서 오는 당황함이 아닐까?
우리에게 거울의 역할을 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부모, 형제, 교사, 친구, 동료, 자녀 등의 평가이다. 그리고 2차적으로는 사회의 평가이다. 그들이 ‘효자’라고 알려주면 우리는 자신이 효자인 줄 알고 살아간다. 그들이 ‘똑똑하다’고 알려주면 자신이 똑똑한 줄 알고 살아간다. 하지만 그들의 평가가 진정 나 자신을 정확하게 보고 있다고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우리에게 평가를 내리는 모든 사람들도 불완전한 존재이고, 그들이 우리의 모든 모습을 다 볼 수는 없다. 그들과의 관계에서 보이는 우리의 일부분을 보고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한 것을 우리에게 알려줄 뿐이다.
필자는 ‘빨갱이’, ‘미제 앞잡이’ ‘남녀 차별주의자’일 수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아닐 수도 있다. 그들의 판단일 뿐이다. “나는 나일 뿐이다.” 그리고 그 ‘내’가 진정으로 누구인지는 오직 나만이 알 수 있고, 또 나 홀로 찾아가야만 한다. 우리 모두는 어렸을 때는 자아가 약해서 다른 사람들의 판단을 믿고 자신을 정의하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제는 중년. 내가 어떤 사람인 줄 알 수 있을 만큼 살았다. 그리고 자아도 강해졌다. 당연히 중년엔 “내가 누구인지?” 혼란스러워야 한다. 지금까지 ‘나’라고 알고 살아왔던 그 모습이 진정 ‘나’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혼란스럽다는 것 자체가 지금까지의 ‘나’가 진정한 ‘나’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뜻이다. 이제는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를 다시 재정립해야 한다. 앞으로 진정한 ‘나’로 살아야 할 날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년은 참 귀중한 시기이다.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syhan@korea.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