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이 능력주의를 담보하는 절차적 공정성이 없다고 판단하는 순간, 오히려 사회 시스템 전반에 대한 냉소와 회의가 들어설 수도 있다.
![[칼럼]입시제도와 공정성](https://img.khan.co.kr/newsmaker/1237/170724_1237_82.jpg)
최근 새 정부에 대한 매우 호의적인 여론에도 불구하고, 예상되는 대입제도 변화에 대한 반응은 꽤 나쁜 편인 듯하다. 특히 학생부종합전형을 유지·확대하고 정시전형을 축소한다거나 절대평가를 도입하는 정책방향에 대한 반감은 ‘심상치 않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이다. 교육전문가도 아닌 내 생각인즉 그저 한 세대 전의 입시생, 그리고 지금은 학부모로서의 경험철학(?)일 따름이라는 한계를 먼저 자백한 다음, 몇 가지 논점들에 관해 지적해보려 한다.
먼저 교육기회의 평등을 주장하는 이들이 막상 자기 자녀는 이른바 좋은 학교에 보낸다는 흔한 비판이 있다. 사실 위계화한 학벌 시스템 속에서는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비판은 대중적 호소력은 있을지언정 현실성은 전혀 없는 것이다. 굳어진 구조 앞에서 홀로 분연히 맞서는 지사가 되기를 요구해서는 그 어떤 개혁도 성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은 반대방향으로도 교훈을 줄 수 있는데, 남들보다 좋은(‘좋다’는 것이 무엇이건 간에) 교육을 받고 싶다는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으므로 그저 “너의 욕망은 그릇된 것”이라고 가르치려 들어서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사교육은 그 자체가 나쁜 것이고 공교육은 그 자체가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사교육계에도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키팅 선생님 같은 교사가 있을 수 있고, 공교육에도 온갖 나쁜 짓을 일삼는 무능력한 교사가 있을 수 있다. 입시가 절체절명의 중요성을 갖는 사회에서는 공교육도 얼마든지 타락할 수 있으며, 더 나쁘게도 그 경우 사교육과는 달리 선택의 여지마저 없어진다. 사교육이 나쁜 진정한 까닭은 경제력 격차에 따라 그 기회가 지극히 불평등하게 주어진다는 점 때문이다. 요컨대 공교육을 정상화하자는 것도 그 궁극적 목표는 공평한 교육기회를 제공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노동시장의 문제와 연계되지 않은 대입제도 변화는 정작 상황은 개선하지 못한 채 사회적 비용만 증가시킬 뿐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방대학의 전반적인 위기 속에서도 의과대학만은 입시의 핵으로 떠오른 지 오래다. 이러한 현상은 심지어 자원의 효율적 배분이라는 냉정한 경제학적 논리에서조차 비판할 소지가 많지만, 어쨌거나 거스르기 어려운 대중적 욕망의 흐름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졸업한 뒤에 좋은 일자리를 얻기 어렵다면 지역대학에 아무리 많은 정부 자금을 지원해도 지역인재가 진학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대입 시점의 학업성취도가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낙인처럼 남아 경제적 성과를 결정하는 구조가 지속되는 한, 중·고교 시점에서의 어떤 좋은 제도개선도 무력화될 가능성은 항상 존재한다.
이른바 촛불혁명을 촉발한 시대정신 중의 하나는 그 우발적 계기였던 이화여대 부정입학 스캔들에서 드러나듯 공정성이라는 화두였다. 학벌 시스템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능력주의에 대한 믿음을 지탱하는 축이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정답이 정해진 지필시험의 결과가 가장 공정하다는 믿음을 섣불리 재단하기 어려운 까닭도 여기에 있다. 능력주의라는 원칙이 많은 경우 왜곡된 현실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대중이 능력주의를 담보하는 절차적 공정성이 없다고 판단하는 순간, 능력주의 이데올로기가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 시스템 전반에 대한 냉소와 회의가 들어설 수도 있다. 그렇게 될 때 자칫 모든 개혁에 대한 시도가 힘을 잃을 수 있는 것이다.
<류동민 충남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