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모시기 전 남편과 그렇게 다짐했건만, 기왕 모실 거면 절대 예전 얘기 안 꺼내기로 다짐했건만 이미 입 밖으로 튀어나와 엄마의 가슴속에 파편으로 꽂혔다. 엄마가 말없이 돌아선다. 작고 휜 등짝을 보이며 방으로 들어간다.
대학생 두 아들과 회사원 남편과 살고 있는 그녀에게 초라한 모습으로 다가온 친정엄마는 환영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존재였다. 지금 남편과의 삶이 행복한 그녀에게 어머니의 존재는 마냥 멀리하고 싶은 사람이다. 어린 시절 무능한 아버지 몫까지 다 하는 엄마의 한 맺힌 모습은 보는 가족들을 힘들게 했고, 성인이 돼서도 엄마와의 만남이 그녀에겐 불편 그 자체였다. 그래서 가정적으로 안정되고, 정상적인 부모·자녀 관계 속에 자란 남편과 시댁을 만났을 때 본능적으로 그 안에서 안주하고 싶었다.
“저밖에 모르는 년! 피도 눈물도 없는 년!” 엄마와 자매들의 원성은 그녀의 마음 문 밖에 있은 지 오래다. 그녀의 마음은 단단히 빗장을 걸어 잠그고 자신의 가족만을 지키고 있었다.

/ 김상민 기자
어느 날 언니로부터 긴 전화통화가 있었다. 지금까지 엄마를 모시던 언니 내외가 시댁식구들이 있는 미국으로 가족 이민을 떠난다는 것이다. 그동안 형부는 홀로 되신 장모를 친부모처럼 생각하며 극진히 모신, 듬직하고 착한 사위였다.
“네 형부는 우리가 가서 자리 잡는 동안 엄마를 너희가 모시면 어떻겠냐며 묻는구나.”
“난 못해. 언니 잘 알잖아. 갑자기 왜 그래.” 그렇게 그녀의 태도는 완고했고 싸늘했다.
“그럼 도대체 어떡하니. 막내는 너도 알다시피 시어른들 모시고 사니 형편이 안 되고, 넌 언제까지 엄마를 모른 척할 건데. 여태껏 내가 모셨는데 이제 와서도 모른다면 나도 어쩔 수 없어. 나와 네 형부는 할 만큼 했으니 우린 떠날 거고 너희 둘이 이제부턴 알아서 해. 엄마를 버리든지 말든지. 나쁜 계집애!” 언니의 싸늘한 목소리가 귓속에 맴돌며 전화가 끊겼다.
장녀인 언니는 엄마의 희망이었다. 아들을 낳지 못한 설움을 언니를 통해 보상 받으려 엄마는 언니에게 온갖 정성을 쏟아 키웠다. 언니 또한 남편 사랑도 보살핌도 받지 못한 엄마의 기구한 삶을 잘 알기에 지금껏 엄마를 잘 보살피며 살았다. 때마침 가족 모두 미국으로 이민간 형부를 만나 친정엄마 역시 사돈집 눈치 없이 손자들을 돌보며 지낼 수 있었다. 언제까지나 함께 있을 것 같았던 큰딸과 큰사위가 떠난다니 엄마의 상실감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마냥 멀리하고 싶은 어머니의 존재
언니와 전화 통화 후 며칠 동안 불편한 맘으로 지내던 어느 날 남편이 먼저 얘기 좀 하자며 불렀다. 남편은 형부를 통해 자초지종을 듣고 난 후였다. 그녀가 엄마 때문에 얼마나 힘들어하고 원망이 많은 지 잘 아는 남편은 며칠 동안 그녀 눈치를 살피며 본인도 고민했던 모양이다.
“여보, 당신 맘 잘 아는 데 일이 이렇게 됐으니 어쩌겠어. 그냥 순리대로 하자.”
“순리? 순리가 뭔데? 순리가 통하는 엄마가 아니야. 당신은 몰라!”
“그럼 어떡해. 장모님 거리로 내보낼 거야? 형님네는 미국 곧 들어가야 하는데. 그동안 별별 생각 다 했나봐. 우리에게 말도 못하고 지금까지 고민했는데 날짜는 다가오고 지금은 이 방법밖에 별 뾰족한 수가 없잖아.”
“순리를 아는 사람이면 나에게 그렇게 할 순 없어. 언니를 그렇게 공부시켰으면 때가 되면 나도 시켜야 하는 것 아냐? 언니랑 동생은 공부시키면서 왜 나는 자기 곁에 붙잡아놓고 시장바닥에서 굴리냐구. 나는 엄마를 용서할 수 없어. 내가 그렇게 공부하고 싶다고 나도 도시로 보내달라고 애원했건만 둘 가르치기도 힘들다며 나를 붙잡아 놓은 건 언제고, 이제 와서 우리 집에 오겠다고. 말도 안 돼. 무슨 염치로…. 그나마 지금처럼 1년에 두세 번 만나는 것도 당신 아니었으면 어림 없었어. 난 싫어.”
얼마 후 언니 가족은 미국으로 떠났다. 언니는 떠나기 전 엄마의 구질구질하고 손때 묻은 짐들은 처분하고 비교적 단출하고 깨끗한 짐들만 챙겨 엄마와 함께 그녀의 집에 보냈다. 동생의 까칠한 성격을 아는지라 엄마와의 새로운 시작을 바라는 마음으로 옛날을 떠올릴 만한 것들은 버렸단다.
엄마는 딸의 눈치를 보며 동시에 사위의 눈치 또한 보는 모습이 역력했다. 아침 저녁 출퇴근시간에도, 함께하는 식사시간에도 남편은 아내 대신 장모님을 최대한 편하게 대했다. 그녀는 엄마와의 이 불편한 동거가 못내 못마땅했지만 그래도 남편의 엄마에 대한 배려가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녀 자신이 엄마에 대한 태도를 바꿀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남편의 배려가 고맙고 안심이 되었다.
그렇게 남편의 배려로 마냥 위태로울 것 같던 모녀 사이도 가끔씩은 한편이 되기도 했다. 전날 남편의 과음으로 그녀의 심기가 불편하면, 그런 딸을 보는 엄마의 마음 또한 사위가 곱지 않아 보였다. 사위의 그간의 노력으로 맘이 편안해진 엄마지만 이따금 딸과 한편이 되어 조금씩 잔소리도 거들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아내의 잔소리와 장모님의 잔소리가 합해지면서 남편은 점점 불만이 쌓여갔다. 처음엔 남편의 따뜻한 마음으로 시작된 엄마와의 동거가 어느 사이 잘 지내온 부부 사이에 작은 걸림돌이 되어서 부부는 조금씩 멀어져 갔다.
그녀를 윽박지르던 기세는 찾을 수 없다
“엄마가 틀린 말한 것도 아니고 당신 건강 생각해서 술 마시지 말라고 했는데 그게 그렇게 듣기 싫어? 엄마 맘을 그렇게 모르겠어?”
“내가 매일 마시는 것도 아니고 어쩔 수없이 마신 걸로 당신한테 한 소리 듣는 것도 싫은데 장모님까지 합세해서 건강 들먹이며 잔소리하니 짜증이 더 나잖아.”
“그래서 처음부터 내가 엄마랑 같이 사는 거 싫다고 했는데 왜 당신이 나서서 모시자고 해놓고 이제 와서 불평해.”
말도 안 되는 억지가 그녀의 입에서 나온다. 엄마를 보는 것도, 남편의 엄마에 대한 불평을 듣는 것도 불편하고 화가 난다. 남편이 고맙기도 하지만 힘없고 눈치 보는 우리 엄마 하나 못 봐주나 섭섭한 마음이 훅 올라온다. 오갈 데 없는 엄마라고 우리 엄말 무시하는 건가, 몇 달 모실 거라 생각했는데 계속 모셔야 될 것 같아 싫은 건가, 그녀는 혼자서 이런 저런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하고 서운하고 야속한 마음에 괜스레 엄마한테 화풀이한다.
“엄만 왜 회사일로 힘든 그 사람한테 이러고 저러고 그래? 그냥 좀 가만히 있어.”
“왜? 김 서방이 나 땜에 너한테 뭐라 하든?”
“뭐라 하는 게 아니라 그렇잖아. 내가 잔소리하는 데 엄마까지 그러니까 신경질 나지.”
“나야 네가 힘들어 하니까 옆에서 보기 안쓰럽고 김 서방 건강도….”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가 쏘아붙인다.
“언제부터 엄마가 나 안쓰러운 걸 신경 썼다고 그래. 예전에나 좀 그러시지. 엄마 안중에 내가 있기나 했어?”
수십 년 묵은 앙금이 앙칼지게 쏟아진다. 엄마 모시기 전 남편과 그렇게 다짐했건만, 기왕 모실 거면 절대 예전 얘기 안 꺼내기로 다짐했건만 이미 입 밖으로 튀어나와 엄마의 가슴속에 파편으로 꽂혔다. 엄마가 말없이 돌아선다. 작고 휜 등짝을 보이며 방으로 들어간다. 한마디 말이 없다. 그 옛날 말도 안 되는 소리로 그녀를 윽박지르던 기세는 찾을 수가 없다.
“네 언니는 공부해야 하고, 네 동생은 아프니 앉아서 공부하는 거 말고 뭘 할 수 있겠니! 너야 건강하니 나랑 이렇게 젓갈이라도 만들어 팔면 되는 거지, 뭔 불만이 그리 많아 주둥이가 댓발 나왔니. 그나마 이거라도 만들어 파니 먹고 살 수 있는 거야. 이 한심한 년아!”
귓가에 예전 엄마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자, 그녀의 설움이 북받친다. 남편에게선 엄마를 지켜내느라 억지 부리고, 엄마한테선 남편을 편들다 엄마 마음을 할퀴고, 그녀의 어린 시절 상처는 여전히 가까운 곳에서 그녀를 위협하는 듯했다.
<서송희 만남과 풀림 대표 suh0623@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