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파인증’이라는 이름의 비관세장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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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계 전자제품 기업들은 신제품 발표 후 한 1개월은 영업정지 상태가 된다. 글로벌 동시 발매라도 유독 한국에서는 ‘구매 불가’ 상태를 유지당하기 때문이다. 전자제품 특성상 신제품 발표 후 구제품은 시장에서 퇴출절차를 밟게 되는데, 정작 그 신제품은 팔 수도 없다. 전파인증 때문이다.

각 국이 시행하는 인증마크들./www.kostec.org

각 국이 시행하는 인증마크들./www.kostec.org

전파인증을 하는 나라가 한국뿐만은 아니다. 주권국가라면 대개 각자의 기준에 따라 규제를 만든다. 미국의 FCC ID나 유럽의 CE가 이에 해당한다. 국가 간 협의에 따라 조정하기도 하지만, 결국은 주권에 따라 결정하는 일.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는 일이다. 게다가 원래라면 전파 발신을 위해 누구나 면허가 있어야 하는 것이 근대적 상식이다. 인증받은 공산품을 쓰는 조건으로 면허 없이도 전파 이용 허가를 내주는 셈이니 이 또한 규제 완화로 감사해야 할 일이라는 의견도 있다. 나름의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듈화의 시대. 대개의 부품업체는 주요 시장의 규제를 따른 세계 사양의 칩을 양산한다. 이 부품들이 조립된 양산품이 문제를 일으킬 확률이 없지는 않지만, 극히 낮다. 그 가능성이 충분히 낮으니까 이미 개인적 용도로는 1인 1대에 한해 인증을 면제하고 있다. 한때는 조립PC도 전파인증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반발에 져 거둬들였다. 이처럼 자의적 법 해석과 적용은 이미 전파인증이 형식적 절차에 불과한 규제라고 고백한다.

MRA(상호인증협정)를 완전히 매듭지으면 미국과 유럽의 인증을 인정하게 되니 깔끔히 풀릴 일이지만 쉽지 않은가 보다. 서로들 굳이 서두를 동기부여가 없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갤럭시 신제품 발표행사인 언팩 이벤트 1~2주 전에는 FCC 인증을 미국에서 끝마친다. 그 정보는 검색되어 공개되므로 루머로 흘러나간다. 최대 시장 미국에서는 그런 루머조차 마케팅이다. 문제는 거꾸로는 기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국 기업들은 작은 시장인 한국에서 루머를 촉발시킬 이유가 별로 없다.

글로벌 제품의 1차 출시국에서 유독 한국만 자의반 타의반 제외되니 우리는 신제품을 그림의 떡처럼 바라보다가 이미 선도가 떨어져버린 제품을 나중에 감사히 구매하는 ‘대기수요’ 신세가 되어버린다. 기술은 신선식품과 같아서, 제품은 시장에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 가치의 감가(減價)가 맹렬하게 일어난다. 군소제품 중에는 인증비용 부담으로 아예 수입을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 수입된다 해도 비용은 결국 소비자에게 전가된다.

선택의 자유를 잃은 소비자는 명백히 피해를 보고 있지만, 그 피해는 얇고 넓기에 불만을 표시해도 유별난 소비자가 된다. 이렇듯 전파인증은 수출 대기업을 위한 튼튼한 비관세장벽이 되어준다. 정부 입장에서도 세수도 적절히 걷히고 대행업체 등 관변 산업도 유지되며 또한 자국산업까지 보호한다고 하니 애써 현재의 틀을 뒤흔들 인센티브가 없다. 부품이 이미 인증되었다면 출시를 허하고, 공칭값을 벗어나 전파로 물의를 일으킨다면 과징금을 물리고, 리콜을 하면 되련만 그렇게는 하지 않는다. 드론에서 사물인터넷까지 부품을 조합해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야 할 스타트업에게는 시작부터 비용과 시간의 족쇄가 채워진다.

한국형 전파인증은 신산업의 가능성과 소비자의 선택권 대신 현 질서의 유지를 선택하고 있는 것뿐이다. 이 점에 모두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김국현 IT 칼럼니스트·에디토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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