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변했다. 요즘에는 아버지의 말이라는 바로 그 사실 하나로 무조건 따르는 집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은 없어진 지 오래고, 그런 말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젊은 세대들이 많다.
요즘 중년의 가장들 입에서는 “가장 노릇 힘들어서 못하겠다”는 탄식 아닌 탄식을 자주 들을 수 있다. 그러면서 꼭 “옛날 아버지들은 집에서 큰소리 한 번 안 내도 가족들이 알아서 잘 움직였는데, 요즘은 큰소리를 내도 가족들이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를 부러워하는 말도 자주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 가장들이 어렸을 때의 가정은 대개 비슷했다. 보수적인 집에서는 아버지는 따로 상을 받으셨고, 아버지가 가끔 맏아들을 불러 상에 있는 맛있는 반찬을 먹을 수 있는 특권을 주곤 했다. 어머니를 비롯한 다른 가족들은 다른 상에서 식사를 했다. 물론 아버지 상에는 더 맛있는 반찬이 놓여 있곤 했다. 가정의 대소사에서 아버지의 위엄은 대단했다. 아무리 실타래같이 꼬인 가정사라도 아버지의 결정 한마디면 끝났다. 비록 마음에 안 드는 결정이라 할지라도 아버지의 결정이 내려지면 모든 가족은 그 결정을 따라야만 했다. 그리고 그런 집이 뼈대 있는 집이고 화목한 집이라고 생각했다. 부창부수(夫唱婦隨)의 미덕을 따르는 어머니는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기보다는 대개 아버지의 결정에 기꺼이 따랐다. 그리고 자녀들에게도 아버지의 말씀에 따르도록 가르쳤다.
세상이 변했다. 요즘에는 아버지의 말이라는 바로 그 사실 하나로 무조건 따르는 집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은 없어진 지 오래고, 그런 말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젊은 세대들이 많다. 어머니도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집안이 많아졌고, 자녀들도 무조건 아버지의 말을 따르는 경우는 점차 사라지고 자신의 의견을 당당히 밝히는 경우가 많아졌다. 만약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고 여겨지는 요구를 아버지가 하시는 경우에는 따르지 않는 경우도 많아졌다.

부부가 서로의 의견을 굽히지 않고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모습./김상민 기자
자식들도 자신의 의견 당당히 밝혀
문화가 변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문화는 제일 잘 적응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변한다. 그런 의미에서 문화는 생명을 가지고 계속 변화한다. 자연에서는 환경에 잘 적응하는 종(種)만이 살아남는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라는 생존의 법칙은 문화에서도 진리이다.
우리가 아버지에게 절대적인 권위를 위임하는 가부장제를 택한 데에는 그만한 생존의 이유가 있었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지리적 여건 때문에 5000년의 역사 동안 수없이 외침에 시달려 왔다. 비교적 최근의 큰 외침(外侵)만 해도 조선시대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그리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등이 있다. 이 외에 작은 외침은 세기 힘들 정도로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안으로는 계속되는 불안한 정세와 탐관오리들의 학정으로 매일 매일의 살림살이도 힘겨웠다.
이런 상황에서는 가족 구성원들의 개성을 존중하고 민주적인 토론절차를 거쳐 가내 대소사를 결정하는 것은 매우 비효율적이었다. 이런 조건에서는 한 사람이 결정을 내라고, 그 결정에 일사불란하게 따르는 것이 생존에 제일 적합한 의사결정 방식이었다. 이런 생존의 상황에서는 아버지의 권위가 절대적이 되고, 아버지와 아들로 이어지는 가부장제가 정착된다. 그리고 아들은 절대적으로 아버지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효’라는 문화가 형성된다. 반대급부로, 아버지는 자신의 모든 능력과 노력을 동원하여 아들이 성공하도록 도와야 한다.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헌신과 희생, 그리고 아들의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이 하루하루 불안에 떨면서 살아야 하는 환경에서는 제일 안정적이고 살아남을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변했다. 군사력을 앞세운 무력침공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경제력과 문화력을 앞세운 경쟁이 훨씬 더 중요하게 됐다. 영토의 개념도 단순한 지리적인 개념이 아니라 자국의 경제력과 문화력이 영향을 발휘하는 곳으로 확장하고 있다. 경제력은 신체적인 힘이나 단순노동을 열심히 하는 것으로 강해지지 않는다. 이젠 창의력과 다른 사람과의 효율적인 인간관계를 통한 협동이 중요한 시대다.
문화가 변한다는 것은 그만큼 환경이 빨리 변한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판단이 옳기 위해서는 문화가 변하지 않아야 한다. 그런 환경에서는 경험이 많은 아버지의 판단이 맞을 확률이 높다. 당연히 아버지의 말씀을 잘 듣는 것이 성공할 확률이 높다. ‘부모의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 것은 부모의 말이 항상 맞다는 근거 위에서만 옳다. 문화가 빨리 변하면 아버지 세대의 경험이 옳은 결정을 담보할 수는 없다. 길안내 서비스로 예를 들어보자. 요즘에는 도시와 농어촌을 막론하고 개발이 이루어진다. 2~3년 전의 정보를 알려주는 길안내를 받았다가는 황당한 경험을 하기 일쑤이다. 이미 고속도로로 변한 지점에서 좌회전하라는 안내가 나오기도 하고, 또 멀쩡히 도로가 나 있는데도 길이 없다는 안내를 하는 경우도 많다. 이미 대단위 아파트 단지로 변한 곳을 못 찾기도 한다. 하루가 멀다하고 개발이 빨리 일어나는 곳에서는, 즉 환경이 빨리 변하는 곳에서는 계속 새로운 정보를 입력해야 정확한 길안내를 할 수 있다.
절대적인 권위와 절대적인 책임 사라져
지도자가 아무리 유능하다고 하더라도 각자의 개성과 적성이 다른 여러 사람의 경험과 지식을 능가할 수 없다. 특히 획일적이 아니라 다양한 요인들이 서로 경쟁하고 협력하는 다원화 사회에서는 여러 사람이 자유스런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나눌 수 있어야 조직의 성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가족도 예외는 아니다. 이제는 가장 혼자의 경험과 결정이 최선이라는 보장도 없을 뿐만 아니라, 가족 개개인의 경험과 욕구를 무시한 가장의 일방적인 지시는 더 이상 가정의 화목을 이끌어낼 수 없다. 지금의 중년은 가장의 권위가 절대적인 모습을 어렸을 때 경험하면서 성장하였다. 그들의 깊은 내면에는 절대적인 가장의 권위 행사만이 각인되어 있다. 가장의 역할에 대해 별로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막연히 어렸을 때 보았던 아버지의 모습으로 가정을 이끌어나가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가장이 되고 보니 옛날 아버지의 모습으로 가정을 이끄는 것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고 있다. 요즘의 자녀는 옛날 자신이 어렸을 때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그때는 아버지의 기침소리 하나로 온 가족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지만, 지금은 기침하는 자신만 목이 아프고 무시당한다는 느낌만을 가질 뿐이다. 부인과 자녀가 마치 미리 짠 것처럼 가장의 말을 더 이상 고분고분 듣지 않는다.
모든 것은 긍정과 부정의 양면이 있다. 가장의 절대적인 권위는 절대적인 책임과 동전의 양면이다. 가장의 절대적인 권위가 사라져가는 만큼 가정의 대소사에 모든 책임을 지는 무거운 짐도 가벼워진다. 이제는 혼자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 구성원 모두가 자신의 의견을 편하게 개진하고 서로 의논하여 결정하는 것으로 바뀌고 있다. 아버지의 의견에 복종하지 않는 것이 아버지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한쪽이 맞고 다른 쪽이 틀린 것이 아니다. 다만 생각이 다를 뿐이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개인들이 조화로운 관계를 맺는 조직이 급변하는 환경에서 살아남을 확률이 제일 높다. 물론 책임도 분산된다. 요즘 중년의 가장은 가족 내에서 권위가 작아지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동시에 혼자 가족을 책임져야만 한다는 막중한 짐을 계속 지고 있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 쪽배와 같은 작은 배는 쉽게 방향을 돌릴 수 있지만, 항공모함과 같은 거대한 배는 방향을 바꾸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가족 구성원 각자가 선호하는 변화의 시간이 모두 다를 수 있다. 즐거운 가정이 되기 위해 이 시간의 차이를 지혜롭게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