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의 탁성으로 듣는 ‘서울 서울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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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필의 ‘서울 서울 서울’이 흐르면 희한하게도 장병들의 몸짓은 달라졌다. 집단으로 펼쳐내는 동작도 ‘손에 손잡고’와는 달랐다. 장병들의 동작은 마치 클럽에 놀러온 사람들처럼 자연스러웠다.

조용필의 노래 ‘서울 서울 서울’을 몇 번이고 듣고 또 들었다. 나는 이 노래의 전체 진행, 즉 단지 가사만이 아니라 대단한 기량의 외국인 연주자들이 가세한 이 곡의 세부적인 디테일까지 다 알고 있다. 워낙 유명한 곡이기 때문에 까짓 그 정도를 기억하는 게 무슨 자랑이냐 이렇게 핀잔을 줄 독자들도 있을텐데, 좀 더 얘기를 들어보기 바란다.

이 곡이 크게 히트할 무렵은 우리나라가 88올림픽이라는 거대한 신드롬에 몰입되어 있던 시기였다. 해방 이후 한국 사회가 특정한 이벤트에 이 정도로 사회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은 일은 달리 없었다.

그때 나는 군대에 있었는데, 서울 근교에 위치한 부대라서 대규모 행사의 온갖 일들에 차출되고 동원되었다. 우리 부대는 최소한의 영내 관리 사병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올림픽 각 경기장의 안팎이나 성화 봉송로 경계 및 개·폐막식의 대규모 행사에 우르르 뛰어다니는 일을 감당해야 했다.

5월21일 '서울로 7017' 보행로 개통 기념 걷기대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공중자연쉼터를 지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5월21일 '서울로 7017' 보행로 개통 기념 걷기대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공중자연쉼터를 지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88올림픽 때 군 연병장에서 들었던 곡

그때 흐르던 음악이 두 곡 있었는데 하나는 코리아나가 부른 ‘손에 손잡고’이고, 다른 하나가 조용필의 ‘서울 서울 서울’이었다. 영내에서 밤낮으로 두 곡을 듣고 들었으며, 때로는 1인 열외 없는 매스게임 연습에도 참여하여 두 곡에 맞춰 손을 흔들고 발을 구르면서 장마철을 보내야 했다.

그래서 그 곡들이 몸 속으로 스며들었다. 물론 두 곡의 느낌은 전혀 달랐다. ‘손에 손잡고’가 연병장 스피커를 통해 울려퍼지면 장병들은 한편으로는 절도 있는 동작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도 건조하고 밋밋한 동작을 반복했다. 그렇게 오전 연습이 끝나고 짧은 식사를 한 후 오후가 되어 조용필의 ‘서울 서울 서울’이 흐르면 희한하게도 장병들의 몸짓은 달라졌다. 집단으로 펼쳐내는 동작도 ‘손에 손잡고’와는 달랐다. ‘손에 손잡고’가 다소 둔탁하게 희망의 몸짓을 해야 하는 것에 비하여 ‘서울 서울 서울’은 기본적으로 뛰어난 화성 전개에 애틋한 정서가 물 흐르듯이 펼쳐지는 것이어서, 장병들의 동작은 마치 클럽에 놀러온 사람들처럼 자연스러웠다.

윤상은 이 노래와 10집 앨범에 대하여 ‘눈부신 사운드와 편곡이 돋보이는 수작’이라고 했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이 음반 듣고 용필이형한테 환호를 보냈어요. 왜냐면 이 음반은 더 이상 가요가 아니었기 때문이에요. 사운드가 10년 앞서간 것은 물론이고, 믹싱 등 음반 구성과 곡의 느낌들이 일관성을 유지했어요”라고 회고했다. 손무현 또한 “당시까지 국내의 어느 음반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완벽한 편곡과 연주로 나에게 교과서와도 같은 기준”이라고 평가했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면, 틀림없이 슬프고 애틋하고 더러는 가슴 미어지는 노래인데, 풍요롭게 전개되는 화성의 힘이 장병 모두의 몸을 가볍게 흔들어준다. 물론 매스게임의 특성상 미리 주어진 동작을 반복해야 하고 약속된 형태로 돌거나 서는 것이었지만, 이 노래의 놀라운 힘에 의하여 마치 장병들은 누가 시켜서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 이 곡이라면 응당 이렇게 해야 한다는 듯 아름다운 동작을 반복했다.

작사가 양인자는 도시의 서정시인

나도 그랬다. 몇날 며칠을 그리 하다 보니 그 노래가 몸에 밴 것이다. 지금도 몇몇 동작은 기억에 남는다. 물론 다음과 같은 가사를 지금 다시 들어도 심장이 조금은 빨리 뛴다. 풀밴드 사운드의 전주가 끝나고 나면, 키보드의 살랑거리는 리듬에 맞춰 조용필의 탁성이 들려온다.

해질 무렵 거리에 나가 차를 마시면
내 가슴에 아름다운 냇물이 흐르네
이별이란 헤어짐이 아니었구나 추억 속에서 다시 만나는 그대

물론 이 노래는 국가 행사를 위한 노래다. 2절의 가사가 그것을 말해준다. ‘내 인생에 영원히 남을 화려한 축제여’, 즉 88올림픽 얘기다. 그러나 ‘손에 손잡고’와 같은, 관제적이며 상투적이며 진부한 곡에 비하여 얼마나 아름다운가. 곡의 후반으로 가면 키보드에 의하여 모든 악기가 상승하고 그에 반하여 조용필의 목소리는 더욱 착잡하게 가라앉으며 쓸쓸한 서정, 이 회색 도시의 헛헛한 마음, 그의 다른 노래 ‘킬리만자로의 표범’의 가사처럼 ‘화려하면서도 쓸쓸하고 가득찬 것 같으면서도 텅 비어 있는 내 청춘’의 비정한 도시의 감정이 고조된다. 이때쯤이면 스무 살 안팎의 장병들은 2절의 가사를 몸으로 표현하면서 마음이 울적해지고 더러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 곡의 작사가 양인자는 적어도 이 곡에 한하여 말할 때 도시의 서정시인이다.

베고니아 화분이 놓인 우체국 계단
어딘가에 엽서를 쓰던 그녀의 고운 손
그 언제쯤 나를 볼까 마음이 서두네
나의 사랑을 가져가 버린 그대

서울역에서 남대문으로 넘어가는 고가도로가 완전 철거되지 않고, 사람이 걸어서 이쪽에서 저쪽으로, 또는 한가롭게 거닐 수 있는 공원으로 탈바꿈했다. 그래서 보러 갔다. 도시의 격변, 그 속에서 형성된 문화적 라이프 스타일의 미묘한 변화들, 또한 그것을 단 하나의 작품으로 응축하여 보여주는 음악에 집중해온 이 연재의 필자로서,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개장 초기라서 그런지 때이른 더위에도 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나왔다. 점심 이후의 짤막한 휴식을 보내는 직장인도 있었고, 일부러 작정을 하고 구경을 나온 노인들도 많았다. 모두들 고가를 걸으면서, 철거되지 않고 재사용된 고가에 대해 생각했고, 도심 한복판의 꽤나 높은 곳에 서서 사방의 빌딩들과 그 사이에 배어 있는 삶의 흔적들을 이야기했다. 두 말할 것도 없이, 오래되어 노후한 것이라 해서 무조건 철거하는 것이 능사가 아님을 이 고가는 웅변해준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나이와 경험을 토대로 스스로의 도회지 삶을 추억하고 그 물컹한 기억들, 힘겹기도 했고 정겹기도 했던 정서를 애써 꺼내 매만지고 있었다. ‘흉물’ 논란이 빚은 3만 켤레의 낡은 신발로 구성한 공공미술작품 ‘슈즈 트리’ 역시 얼핏 흉물처럼 보이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의 관점에서 감탄도 하고 질문도 했다. 물론 모두가 사진을 찍었다. “신발은 우리가 도심 속에서 잃어버린 가치가 무엇인지 방향성을 제시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는 황지해 작가의 말은 실제로 그곳에 가서 보았을 때, 어느 정도 울림을 주는 바가 있었다.

나는 오래 전부터 이 고가도로를 자동차로 지나갈 때마다 한 번은 일부러 급정거를 해서라도 서울역 아래위의 풍경을 반드시 보겠노라고 했었지만, 쌩쌩 달리는 왕복 2차선 도로에서 감히 그것을 실행할 수는 없었다. 그랬기에 더욱 이 고가 위에 한참이나 머무르면서 서울이라는 대도시의 속도와 방향에 대해 생각했다. 속도는 조금 늦추고 방향은 조금 다른 곳으로 지향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서 마음속 깊이 저장된 노래를 떠올렸다.

서울 서울 서울 아름다운 이 거리
서울 서울 서울 그리움이 남는 곳
서울 서울 서울 사랑으로 남으리.

<성공회대 문화대학원 교수>

정윤수의 길 위에서 듣는 음악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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