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지킬 수 있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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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식의 사회]영혼을 지킬 수 있는 사회

나는 끊임없이 만들고 노력해야만 하는 과정으로서의 민주주의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누구나 스스로가 있는 자리에서 지나친 굴욕감을 느끼지 않으면서 일할 수 있기를 확보함으로써 가능하다고 믿는다.

일본에 다녀왔다. 원래의 목적은 경제학 관련 세미나에 참석하는 것이었는데, 지인의 요구로 어느 시민단체가 주최한 공부모임에서 얼떨결에 한국의 ‘데모형 민주주의’에 관해 어설픈 분석을 곁들인 발표까지 해야 했다. 그런데 동석한 일본인 정치학자가 정말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한국의 대통령은 진정 그토록 권한이 막강한가?”라는 질문을 던져 온다. 어차피 모인 사람들 중에 한국인은 나 하나뿐이고 명색이 연사였으므로 자신 있게 대답했다. “무릇 한국에선 크고 작은 모든 조직의 보스들은 적어도 임기 중에는 아랫사람들 눈치 안 보고 일단 마음에 먹은 일은 다 하는 경향이 있다.” 머릿속에 전혀 없던 생각이 갑자기 입 밖으로 나왔을 리야 없건만, 한 번 입으로 내뱉은 말은 스스로 생명력을 갖고 벌써 몇 주째 주술처럼 내 생각을 휘어싼 채 돌고 있다. 몇 달 동안 숨 가쁘게 전개된 정치적 변혁의 대단원을 앞두고 있는 이 시점에서 우리가 얻어낸 것은 무엇이고 얻지 못한 것은 무엇인지 중간정산을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오지랖 넓은 강박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본이 그토록 부러워하는 한국 민중의 힘

일단 촛불시위로부터 이어진 일련의 사건은 이념논쟁도, 그 흔한 국가안보 문제도 아닌, 상식과 몰상식의 대결이었다는 점에서 그것이 95:5이건 80:20이건 간에, 어쨌거나 단순명쾌한 전선이 그려지는 것이었음은 분명하다. 물론 지난 몇 달 동안의 격동이 고작 대통령 하나 바꾸려는 것이었는가라는 자조 섞인 목소리도 들린다. 그렇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사회의 변화인즉 원래 그러한 것이리라. 다양한 정파와 물질적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현대사회에서, 예의 모임에서 일본의 시민들이 그토록 부러워했던 한국 민중의 힘이 제 아무리 폭발적이라 하더라도 권력을 제멋대로 휘두른 대통령을 몇 달 안에 구치소에 가둔 것보다 더 나아간 성취를 이루기는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돌이켜 보면 1987년 6월항쟁이 비록 절반의 성공이나마 거둘 수 있었던 것도 폭압적인 군사정권이라는 악의 축이 마치 할리우드 영화처럼 너무나도 선명하게 눈앞에 보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군사정권 아래에서 꿋꿋하게 사법고시 공부로 입신양명의 길을 걸었던 이들도, 사회주의 혁명이 임박한 것처럼 살다가 비장하게 극우투사로 거듭난 이들도, 모두가 같은 하늘을 이고 숨 쉴 수 있게 된 것이다.

텔레비전을 켜면, 경마 중계라도 하듯 하루 걸러 한 번은 여론조사 결과가 나온다. 그리고 우리는 주식종목을 결정한 투자자의 심정으로 수많은 정치평론가들의 이런저런 분석과 전략 및 예측을 바라본다. 그런데 정권교체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발전시켜 나가야 할 동태적 과정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어떻게 정의하는가라는 문제일 것이다.

대체로 보수적인 이들은 민주주의의 의미를 정치체제나 심지어는 선거제도 등으로 범위를 좁혀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민주주의가 선거제도의 문제만은 결코 아니라는 점은 길게는 지난 30여년, 짧게는 몇 년 동안 한국 사회가 힘들게 학습한 바가 아니겠는가? 때로, 아니 종종 우리는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는 이들과도 함께 사회를 꾸려 나가야 한다. 민주주의라는 게임의 룰을 이해하려 들지 않는 이들을 민주주의적 방식으로 견제하며 보듬고 가야 한다는 역설은 제도만 다듬는다고 해서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나는 끊임없이 만들고 노력해야만 하는 과정으로서의 민주주의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누구나 스스로가 있는 자리에서 지나친 굴욕감을 느끼지 않으면서 일할 수 있기를 확보함으로써 가능하다고 믿는다. 요컨대 모든 영역에서 ‘실무자’들이 스스로의 영혼을 지킬 수 있는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굴욕 참아야 하는 이들

잘 알려진 것처럼, 대통령 앞에서 머리를 처박고 수첩에 받아 적기를 해야 했던 수석비서관은 다시 재벌기업 경영자 앞에서 자신이 겪은 일을 그대로 재현했다. 그러나 그 경영자가 기업에 돌아가면 대통령보다 더한 권력을, 그것도 거의 영구적으로 행사한다. 총장이나 학장 앞에서 부당한 성적 처리 지시에 과감하게 저항하지 못했던 교수는 다시금 조교 앞에서 바로 그 보스의 역할놀이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권력과 복종의 피라미드 안에서는 어느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 마치 “식민지 사회에서는 단 한 사람도 자유롭지 못하다”고 말했던 시구처럼.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교육부의 고위 관료는 역사교과서에 나온 주체사상탑의 사진이 너무 깨끗한 것이 좌파편향의 예라는 식의 어처구니없는 논거를 태연하게 들이댔다. 그런데 바로 그 무대 뒤편에서 그보다 하급의 공무원들은 정권의 방침에 소극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징계를 받았던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행동을 사후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심리적 기제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권력에 대한 복종의 굴욕도 시간이 지나면 자신의 소신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거의 파렴치범 수준의 불법을 저질렀던 유력 인사들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새롭게 변신하여 귀환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권력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보지도 못했던 이들이 겪었던 굴욕은 시간이 지나도 보상받지 못한다. 그것이 내 소신이었다고 뒤늦게 얘기한들 그들에게는 당초부터 주목받을 수 있는 자리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잘 나가던 권력자가 수인이 되어 민낯으로 카메라 앞에 서는 자극적 장면이라기보다는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굴욕을 참아야 하는 이들의 실존적 고민일 것이다. 피라미드 아래쪽을 바꾸지 않은 채 위쪽만을 바꿔서는 여전히 만인은 자유롭지 못하거나 오직 몇 사람만 자유로운 상태가 될 수밖에 없다.

일본 사회의 진보적 모임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휴일에 나와 자료비 500엔까지 내며 열심히 공부하던 몇십 명의 참가자들은 거의 장·노년층이었다. 그런데 뒤풀이 자리에서 어느 경제학자가 일본의 청년들도 한국처럼 상황이 나빠져서 취업난에 부딪히게 되면 생각이 바뀌어 행동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문득 외롭고 서글퍼졌다. 당장의 일자리 창출이나 성장전략만이 어지러이 춤추는 이곳에서, 굴욕을 견딜 필요 없이 최소한의 영혼을 지킬 수 있는 사회를 만들려면 훨씬 더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할 것 같다는 암울한 예감 때문이었다.

<류동민(충남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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