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 동아일보는 재미교포 발명가 송기주(1900~ ?)가 한글타자기를 ‘완성’하여 귀국한다는 소식을 크게 보도했다. 송기주는 영문타자기를 개조하여 한글타자기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골동품 타자기를 매개로 1930년대 식민지 경성과 현대 한국을 넘나드는 신기한 인연을 그린 드라마를 보았다. 직업병 때문인지, 1930년대에서 건너왔다는 저 타자기의 자판에는 어떤 것이 달려 있을까 문득 궁금해져서 들여다보았다. 오래된 타자기의 자판은 요즘 우리가 컴퓨터에서 쓰는 자판과 비슷해 보였다. 하지만 똑같은 것은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가 컴퓨터에서 쓰는 한글 자판은 1983년 국무총리 훈령에 따라 표준으로 제정되었다. 두벌식, 즉 자음 글쇠 한 벌과 모음 글쇠 한 벌로 이루어진 단출한 구조다. 굳이 ‘단출하다’는 말을 쓰는 까닭은, 오래된 타자기들은 세 벌, 네 벌, 심지어 다섯 벌까지도 글쇠가 불어나기 때문이다. 한글은 자모를 모아 음절을 만들기 때문에 하나의 자모가 여러 가지 크기와 모양을 갖게 된다. 예를 들어 자음 기역(ㄱ)은 ‘가’에 쓸 때와 ‘고’에 쓸 때, 그리고 받침(종성)으로 쓸 때 각각 음절 안에서 모양과 위치가 달라진다. 컴퓨터에서는 전자회로나 프로그램이 이를 알아서 변환해 주므로 사람은 두벌식 자판으로 자모를 순서대로 입력하기만 하면 된다.

tvN 드라마 「시카고 타자기」에 등장하는 1930년대 타자기 자판. 오늘날 쓰는 컴퓨터 자판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 방송장면
기계식 타자기에서는 타자수가 이러한 변화를 감안하여 각각 다른 글쇠를 눌러 입력을 해야 하므로 글쇠가 그만큼 늘어나게 된다. 따라서 기계식 타자기의 자판은 컴퓨터 자판보다 복잡할 수밖에 없다. 컴퓨터 표준자판에 앞서 등장한 것이 1969년 제정된 기계식 타자기의 표준자판이다. 그림에 보이듯 오늘날의 컴퓨터 표준자판과 상당히 비슷하지만, 받침 없이 쓰는 긴 모음과 받침과 함께 쓰는 짧은 모음 등 모음 글쇠가 두 벌이 있고, 자음도 초성과 종성이 한 벌씩 있어서 모두 네 벌의 글쇠로 이루어져 있다. (1983년 두벌식 표준자판이 발표된 뒤로는 두벌식 기계식 타자기도 제작되었지만, 타자수의 조작이 불편하여 널리 퍼지지 못하고 컴퓨터에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컴퓨터 자판은 1983년, 그 뿌리는 1969년
이것을 보고 다시 드라마 속 타자기를 들여다보면, 두 가지가 똑같다는 것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표준 기계식 타자기는 1969년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전국에서 널리 쓰였으므로 오늘날에도 실물 또는 문헌자료를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제작진이 현행 컴퓨터 자판을 그대로 옮기지 않고 옛날 기계식 타자기의 자판을 확인하여 소품을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궁금한 것은 왜 더 거슬러 올라가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드라마 속의 타자기 자판이 오늘날의 자판보다 오래된 것은 맞지만, 1969년 이전에도 한글타자기는 있었고, 그것들은 전혀 다른 자판을 달고 있었다. 그리고 극중 과거 장면의 시대배경으로 추정되는 1930년대 후반에도 한글타자기가 있었으며, 공교롭게도 그것이 발명된 곳은 다름 아닌 미국 시카고였다.
1934년, 동아일보는 재미교포 발명가 송기주(1900~?)가 한글타자기를 ‘완성’하여 귀국한다는 소식을 크게 보도했다. 송기주는 평안남도 강서 출신으로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24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텍사스 주립대학교(휴스턴)에서 생물학 학사학위를 받은 뒤 시카고로 이주하여 지리학과 지도 제작을 익혔다. 타자기 제작을 전문적으로 배운 것은 아니지만, 미국에서 살면서 ‘이 방면의 문명이 전 미주를 휩쓸고 있는데 (…) 어찌하면 우리글도 이러한 문명의 기계를 이용하여 볼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서 영문타자기를 개조하여 한글타자기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재미교포가 발명한 송기주 타자기 출시를 알리는 1934년 1월 24일 「동아일보」 광고. / 자료화면
시카고 유학생 송기주와 네벌식 타자기
송기주 타자기는 세로쓰기 타자기였다. 일문이나 국문이나 당연히 세로로 쓰는 것이 당시의 글쓰기 문화였기 때문이다. 가로쓰기에 맞춰 개발된 영문타자기로 어떻게 세로쓰기를 할 수 있는가? 답은 의외로 간단한, 그러나 다소 불편한 것이었다. 송기주 타자기나 그에 앞서 재미교포 이원익이 만든 타자기(1914년 추정)는 모두 타자기의 활자가 반시계방향으로 90도 틀어져 있다. 이것으로 글자를 찍고 나서 종이를 뽑아서 시계방향으로 90도 돌리면 세로로 쓴 문서가 되는 것이다. 물론 불편했겠지만, 가로로 쓴 문서를 진지하게 취급하지 않았던 당시에는 어쩔 수 없는 타협이었다. (실제로 송기주는 1929년에는 가로쓰기 타자기를 개발했지만 시장의 외면을 받고 세로쓰기로 노선을 변경하였다.)
송기주는 귀국 후 송일상회라는 회사를 창립하고, 신문에 ‘조선글 타자기’를 광고하며 의욕적으로 타자기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한글타자기에 대한 수요가 형성되지 않았던 때이므로 사업이 성공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광복 후인 1949년 공병우가 가로쓰기 세벌식 타자기를 개발한 뒤부터 한글타자기에 대한 수요가 조금씩 생겨났다. 송기주는 자신의 타자기를 계속 개량하여 때를 기다렸으나, 한국전쟁 중 납북되고 말았으며 이후 소식은 확인할 길이 없다.
2017년에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시대극을 즐기는 우리들에게, 세로쓰기 한글타자기와 같은 것은 매우 낯설다. 우리는 모두 한글을 잘 알고 있다고 믿는다. 한글의 구성원리가 간단하므로 한글 기계화도 쉬웠을 것으로 막연하게 전제해 버린다. 하지만 송기주 타자기를 마주했을 때 바로 사용법을 익혀서 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국립한글박물관에는 관람객들이 자유롭게 체험할 수 있도록 두벌식 기계식 타자기가 공개 전시되어 있는데, 겉보기에 똑같은 두벌식 자판으로 컴퓨터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젊은 관람객들이 그것으로 문장을 찍기는 쉽지 않다. 사전지식 없이 송기주 타자기의 사용법을 알아내는 것은 훨씬 어려운 일일 것이다. 컴퓨터가 많은 작업을 보이지 않게 처리해주어 느끼지 못할 뿐이지, 한글을 기계로 찍는다는 것은 실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 낯섦이야말로 역사 연구가 계속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고 쓰는 것들이 사실은 당연하게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 기술이 오늘날 우리가 보고 쓰는 형태로 진화해야 할 필연적 이유 같은 것은 없다는 이야기, 이것이 과학기술의 역사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송기주가 납북된 뒤에도 아들 송병훈씨는 그의 타자기를 고이 간직했다. 2014년 국립한글박물관이 문을 열자 손자 송세영씨가 송기주 타자기를 기증했고, 그 덕택에 지금은 누구나 박물관을 찾아 송기주 타자기의 실물을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친숙해 보이지만 낯선 기계는 80여년에 걸친 한글 기계화의 긴 여정을, 그리고 전혀 당연하지 않았던 일을 결국 당연해 보이도록 만들어낸 선배들의 노고를 새삼 일깨워 준다.
<김태호 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