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나먼 민주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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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식의 사회]머나먼 민주공화국

2017년의 봄을 만든 것은 국민들이다. 광장에 나온 국민들이다. 수천만 개의 촛불이다. 어둠은 결코 빛을 이길 수 없다는 진리다. 그런데 전리품이나 챙기려는 정치인들의 얕은 술수가 이 나라의 변화를 가로막고 있다.

왕정의 잔해는 여전히 미세먼지처럼 나부낀다. 오늘 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서울중앙지검 구치감 1002호실에 있다. 거기엔 침대와 소파가 있다고 한다. 판사의 결정을 기다린다. 밤새 기다리는 사람도 있다. 쉼보르스카 시인이 말한 ‘귀머거리의 텅 빈 시간, 다른 모든 시간의 바닥’인 새벽 4시를 넘긴다. 국민들은 의구심을 떨치지 못한다. 수없이 반복된 일이다. 작은 물고기는 사정없이 잡아채지만 큰 물고기들은 유유히 빠져나가는 역사 때문이다. 이재용 영장심사 때도 너무나 당연한 구속영장 발부를 밤새 초조하게 기다린 국민들이다(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영장은 오전 3시3분에 발부됐다).

물론 불구속 수사의 원칙은 지켜져야 한다. 검찰이 자신의 수사 편의를 위해 구속을 남발하는 것은 명백한 권력남용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공평해야 한다는 점이다.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누구도 특혜를 받아서는 안 된다. 돈이 많다고, 권력이 많다고 특별대우를 해서도 안 된다. 우리가 국가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최소한의 합의이자 윤리다.

예외없이 피의자는 공평하게 다뤄야

왕이 법 위에 군림하는 왕정국가가 아니라 법이 왕을 지배하는 법치주의 국가라면 말이다. 사법정의는 평등의 최소한이다. 그것이 민주주의이고 공화주의다. 피의자는 공평하게 다뤄야 한다. 예우라는 이름의 예외가 있어서는 안 된다. 역사적으로 사법정의가 무너지면 공동체가 파괴된다. 시민은 저항의 권리를 가졌다. 이제 시민은 언론도 가졌다. 시민들은 광장에서 무도한 권력을 회수한다. 행정권력도 의회권력도 회수한다. 사법권력도 마냥 무사한 것은 아니다. 정의가 무너지면 민심의 파도가 덮칠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이 검찰청에 가고 올 때를 보자. 마치 국가원수가 퍼레이드하듯 모든 교통을 통제했다. 누구의 판단인가. 치욕을 느꼈다. 국민의 치욕이자 국가의 치욕이다. 범죄자를 개선장군처럼 대우한다. 박근혜는 자신이 약속한 검찰 수사도 받지 않았고, 특검 수사도 거부했다. 헌재에 출석하지도 않았다. 헌재 결정에도 승복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예우한다. 학살자를 사면한 나라의 전통인가.

뇌물죄를 비롯해 무려 13개 혐의를 받고 있는 전직 대통령 박근혜는 검찰과 특검을 거쳐 수집된 모든 혐의를 부인한다. 그런데도 아직 구속영장을 불안해 한다. 법의 상식이 깨져 있는 상태다. 이건 법치국가가 아니다. 민주공화국이라는 이름 앞에 몹시 부끄러운 일이다. 시민의 자존심을 깨뜨린다. 더 큰 권력에 머리를 조아리며 갖은 명분을 붙여 범죄자를 예우하는 습관, 가습기 살인으로 수많은 생명을 앗아가고도 멀쩡하게 빠져나가는 유전무죄에 이르기까지 타락한 법은 가진 자들의 면죄부가 됐다.

3월 10일 대통령 파면을 결정한 헌재 판결문은 국가의 존립 근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 아시다시피, 헌법은 대통령을 포함한 모든 국가기관의 존립근거이고, 국민은 그러한 헌법을 만들어 내는 힘의 원천입니다 (중략) 또한, 어떤 경우에도 법치주의는 흔들려서는 안될, 우리 모두가 함께 지켜가야 할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국민주권주의와 법치주의를 대한민국 민주공화국의 존재 근거로 명시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 사회는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의 범죄에 대해 관대한 문화를 갖고 있다. 정경유착,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법을 우습게 여기는 이유다. 법망을 피하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변호사, 회계사들이 불의한 방법으로 돈을 버는 이유다. 이익은 사유화하고 손실은 사회화하는 이 나라의 규칙은 법보다 강하다. 역사적이기 때문이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 과정은 아직 이 나라가 법치주의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일관되게 보여준다. 권력의 부패 뒤에 숨어서 목소리를 키우는 자들이 아직도 버젓이 청와대에, 정부조직에, 국회에, 검찰에, 언론에 존재하는 이유다.

부와 권력 가진 자들의 범죄에 관대한 사회

우리가 깜짝 놀라는 것은 이른바 태극기 시위로 상징되는 헌법 파괴 세력을 받아들이는 이 사회의 관용적 태도다. 헌재 결정을 노골적으로 부정하는 세력들이 거리를 활보한다. 어디 거리뿐인가. 그들은 아직도 청와대에서 국민 세금을 축내고 있다. 장관들은 뭐하나. 호시탐탐 재기를 노리나. 증거인멸은 안 하나. 청와대는 아직도 치외법권이다. 대통령도 없는데 치외법권이다. 친박 국회의원들은 노골적으로 헌법과 법률을 부정한다. 심지어 다음 정권을 달라고 한다. 촛불혁명 뒤에도 여전히 껍데기뿐인 민주공화국이다. 많은 언론은 이것을 즐긴다. 헌법을 부정하고 법률을 위반하고도 뻔뻔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자유주의 사회라면 그것까지는 인정하겠다. 하지만 최소한 그들이 대한민국의 공직을 차지하고 있어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국민 세금을 축내며 법치를 조롱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세월호 인양 소식은 국가의 존재 이유를 다시 물었다. 국민적 슬픔, 먹먹함이 비탄으로 이어졌다. 유가족들, 나아가 미수습자 가족들의 깨어진 심장을 어찌할 것인가. 3년이 걸렸다. 국민의 생명을 지키지 못한 국가는 살아남은 자들의 심장도 버렸다.

이번 대선의 의미는 한마디로 진짜 민주공화국을 다시 세우는 것이다. 민주공화국이냐 왕정이냐를 선택하는 선거다. 너무 과장된 수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대통령을 비롯한 대한민국의 모든 국가권력이 재벌과 결탁해 사익을 추구한 사상 최악의 스캔들을 겪고도 이 나라는 너무 평온하지 않은가.

2017년의 봄을 만든 것은 국민들이다. 광장에 나온 국민들이다. 수천만 개의 촛불이다. 어둠은 결코 빛을 이길 수 없다는 진리다. 그런데 전리품이나 챙기려는 정치인들의 얕은 술수가 이 나라의 변화를 가로막고 있다. 하지만 어쩌랴. 이 봄은 그 자체로 변화인 것을. 혁명인 것을!

촛불민심의 표층을 이용해 정치적 이권을 챙기려던 수많은 연대론이 패망한 이유다. ‘혁명은 하지 않고 방만 바꿔버렸다’는 시인의 진술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그들은 권력의 전셋방을 찾아 아무데나 기웃거리고 있지 않은가. 헌법을 파괴한 대통령이 채 구속되기도 전에 헌법을 파괴한 그 세력들과 손잡고 개헌을 하겠다고 나선 정치인들은 여전히 헌법 위에 군림하려는 사람들 아닌가. “노예도 노예의 주인도 되고 싶지 않은 것이 민주주의”라는 링컨의 진술은 왜 아직도 이 땅에서 유효한가.

<유승찬 스토리닷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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