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로 외곽, 혜화동로터리에서 성북동으로 넘어가는 길옆 골목에 위치하고 있는 게릴라극장은 좌석 수가 73석밖에 안 되는 작은 극장이다. 보조석을 사용해도 100명이 채 못 들어간다. 하지만 이 작은 극장이 그동안 이루어낸 성과들은 결코 작지 않다. 연희단거리패의 전용극장이긴 하지만, 따로 극장 기획팀과 운영팀도 없이 자체적으로 수많은 레퍼토리와 프로그램을 기획하면서 10여년간 중단 없이 극장을 운영해왔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놀랍다.
또한 첫 개관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게릴라극장은 기획 프로그램은 물론이거니와 대관공연에 있어서도 소극장 연극의 가치를 지키면서 극단의 색깔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해왔고, 그 결과 작지만 보석같이 빛나는 소극장 작품을 수없이 배출했다. 올 4월 16일 폐관을 앞둔 게릴라극장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작품은 오스트리아 작가 페터 투리니가 쓰고 채윤일이 연출을 맡은 연극 <황혼>이다. 오색찬란한 색깔로 빛나다가 마지막에 가장 붉게 타오르는 알프스의 노을을 모티브로 한 이 연극은 그 자체로, 다채로운 연극들로 타오르다가 아름답게 사라지는 게릴라극장의 황혼을 은유하고 있는 듯하다.

/ 연희단거리패
<황혼>은 알프스의 산장 오두막에서 한 맹인노인이 중년여인을 만나면서부터 시작된다. 두 사람은 계속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데, 마치 노을빛처럼 변화무쌍하다. 별 볼일 없는 독거노인처럼 등장했던 맹인남자는 사실 신문방송학을 공부하고 미국에서 원자폭탄 실험을 참관했던 저널리스트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나중에는 이것 또한 거짓말이며 실은 한 지방극단의 연출자였다는 고백이 이어진다. 여자 쪽은 더 드라마틱하다. 덕지덕지 분칠을 한 창녀로 등장했던 중년여인은 사실 한 번도 사랑받아보지 못한 맹인협회 여비서였음을 고백하고, 다시 이를 번복하면서 실은 30년 동안 한 번도 무대에 서 보지 못한 무명배우라는 사실을 털어놓는다.
얼핏 보기에는 대체 뭐가 참이고 거짓인지 혼란스럽고, 무엇이 그들의 본모습인지 헷갈리지만 사실 극중 그들이 연기했던 모든 역할은 직·간접적으로 그들의 인생을 담아내고 또 그 자체로 인생이 되어버린, 그들의 진짜 모습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평생에 걸쳐 이들이 고안해낸 각각의 가면은 단순히 남에게 보이기 위한, 혹은 오락이나 여흥을 위한 연기가 아니라, 외롭고 고통스런 삶을 이겨내기 위해 그들 스스로 선택한 삶의 방식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가면 모두가 어느 정도 그들의 진짜 모습을 담고 있다는 점은 각기 다른 색깔로 하나의 장관을 이루어내는 알프스의 황혼을 연상시키고, 또한 수없이 많은 연극무대를 통해 자신의 색깔을 빚어냈던 게릴라극장의 지난날을 떠오르게 만든다.
한편 알프스의 황혼은 다채로운 색으로 변하다 마지막에 가장 선명하게 타오르는 것으로 유명한데, 극중 맹인남자와 중년여자가 펼치는 마지막 극중극은 이러한 황혼의 클라이맥스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오두막을 떠나기 전, 여자는 평생 혼자서 외우고 연습해온 줄리엣의 대사를 높다란 알프스 산정의 발코니에서 감동적으로 읊조리고, 노인은 40년간 꿈에서조차 잊지 못했던 ‘사랑’이란 단어를 그녀를 통해 다시 한 번 선명히 볼 수 있게 된다. 시시각각 놀라운 변신과 집중력을 보여주는 배우 명계남과 김소희의 섬세하고 밀도 높은 연기는 ‘모든 사라지는 것의 찬란함’을 선명하게 그려내면서 게릴라극장의 마지막 순간을 아름답게 장식한다. 3월 30일부터 4월 16일까지, 게릴라극장.
<김주연 연극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