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겨울 그 촛불을 헛되이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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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식의 사회]“지난겨울 그 촛불을 헛되이 말라”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전태일의 유언이 떠올랐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건물 외벽 ‘박근혜 퇴진’ 떼어낸 자리에 그 보다 더 크게 써서 걸기로 했다. ‘지난겨울 그 촛불을 헛되이 말라.’

지난겨울은 주말마다 촛불로 온 거리와 광장을 밝혔지만, 그래도 몹시 춥고 길었다. 3월이 되고 경칩도 지났지만, 10일 탄핵이 인용돼 박근혜 대통령이 파면되고서야, 비로소 봄이 왔다.

헌법재판소 이정미 재판관이 차분히 읽은 판결문의 마지막 부분,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라는 말이 떨어지는 순간, 나는 백기완 선생님과 함께 통일문제연구소 사무실에 있었다. 선생님은 말이 없었다. 표정도 굳어 있었다. 묘한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백 선생님은 박정희 유신 독재와 맞서 싸우시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출옥하실 때, 그 좋으시던 풍채가 피골이 상접해 몸무게가 40㎏도 안 나갔다니, 그 고통을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김재규가 박정희를 암살했지만, 전두환에 의해 유신이 되살아나는 것을 보고, 또 그것이 야권의 분열로 노태우에게로 이어지는 것을 보면서, 온몸을 던져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으로 대통령은 바뀌었지만, 일제 잔재와 유신 적폐 등 과거를 제대로 청산하지 않은 후과로, 민주주의는 길을 잃고 갈팡질팡하는 가운데 민중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박근혜를 통해 박정희가 부활하는 모습을 보는 백 선생님은 참담함을 넘어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박근혜는 실력도 자격도 인품도 모자라는 철부지인 데다 부모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복수심만 불타는 정신질환자라는 사실을 백 선생님은 잘 알고 있었다. 박정희 유신 부활의 가장 큰 피해자인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등의 투쟁현장에는 빠짐없이 나가 힘을 보탤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백 선생님의 삶의 전부였고 의미였다.

탄핵 순간 감회가 남다른 백기완 선생님

그리고 드디어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촛불이 타오르면서 탄핵으로 마무리될 때까지 촛불집회에는 한 번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집회 때는 언제나 무대 맨 앞자리를 지켰고, 행진은 반드시 힘든 몸을 이끌고 청와대 가까운 곳까지 갔다. 얼마나 간절했으면 촛불집회 예정일 하루 전부터는 물도 드시지 않으셨단다. 긴 집회 시간 중 소변이라도 마려우면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백 선생님 눈망울이 그렁그렁 젖어오고 있었다. 그리고는 나에게 “이 위원장, 박근혜가 정말 쫓겨나는 거지?” 하며 다짐하듯 묻는 것이었다. “선생님, 수구반동 세력들이 아무리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설쳐도, 탄핵해야 한다는 여론이 75% 밑으로 내려와 본 적이 없어요. 국민의 상식이 탄핵을 선고한 겁니다.” 나의 대답에 비로소 안도하는 낯빛이면서도, 또 다른 그림자가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흘이 지나 월요일 아침이 됐다. 대부분 직장이 그랬겠지만, 전태일재단도 사무국 회의를 하며 서로를 치하했다. 그러면서 아직도 버티고 있는 박근혜를 걱정했다. 더 큰 비참함을 자초하는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스스로 죄와 벌을 보태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 사무실 건물 외벽에 내걸었던 ‘박근혜 퇴진’이라 크게 쓴 검은 현수막을 내리기로 했다.

전태일재단 사무실은 동대문에서 멀지 않은 창신동 골목 안에 있다. 전태일이 분신 항거한 평화시장 입구와는 10여분 거리다. 창신동은 아직도 골목골목 작은 집들에 영세 봉재공장들이 즐비해, 좁은 골목길은 제품이나 원단과 부자재 등을 실은 오토바이가 종일 누비고 다녀, 걸어다니기조차 힘들 때가 많다. 지난가을 박근혜 탄핵 촛불이 타오르면서 재단 건물 외벽에 ‘박근혜 퇴진’이라 크게 쓴 현수막을 걸 때 오히려 가난한 이웃이나 지나는 사람들이 흐뭇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민심을 읽을 수 있었는데, 막상 내리려 하니 묘한 느낌이 드는 걸 숨길 수가 없었다. 박근혜 한 사람이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난다고 무엇이 달라질까 하는 의구심이 들면서,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당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는 것이 어쩌면 건물 외벽에 달아놓았던 ‘박근혜 퇴진’이라 써 붙인 현수막 하나 내리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근혜 퇴진’ 현수막 떨어지자 환호성

정말 그랬다. 탄핵 촛불의 주무대였던 광화문광장만 해도 그렇다. 탄핵의 중요한 이유가 됐던 세월호 참사의 유족들이 함께 싸우며 쳐놓은 천막들은 세월호와 함께 아직도 어두운 바닷물 속에 잠겨 있고, “사드 가고 평화 오라”고 외치는 소리는 미 대사관 앞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블랙리스트에 난도질당한 문화예술인들이 쳐놓은 블랙텐트는 아직도 찬바람에 펄럭이고 있고, 손배가압류에 목이 졸리고 있는 노동자의 한숨은 더 깊어가고, 지하도 먼지 속에서 수년째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 장애인들의 마음은 더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다. 무엇 하나 해결될 조짐도 희망도 없는 시계제로의 상황이다. 그냥 못난 박근혜 한 사람, 집을 옮긴 것밖에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그래도 우리는 ‘박근혜 퇴진’의 현수막을 내렸다. 젊은 친구들이 옥상으로 올라가 혹시나 바람에 풀릴까 꽁꽁 묶어놓았던 끈을 가위로 잘랐다. 그러자 검은 박근혜가 펄럭이며 주르르 밑으로 떨어졌다. 우리는 지나가던 사람들과 함께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박근혜 퇴진의 검은 천이 걷히면서 뾰족뾰족 돋아나는 새 잎의 빛깔과 같은 밝은 연두색 휘장이 나타난 것이었다. 그 빛깔은 내가 전태일재단을 맡으면서 재단의 상징으로 정한 빛깔이었다. 그리고 그 휘장엔 이렇게 씌어 있었다. ‘노동자가 세상의 주인, 우리는 하나.’ 이것은 전태일의 어머니이자 우리 노동자의 어머니인 이소선 어머님께서 늘 하신 말씀으로, 2016년이 어머님 돌아가신지 5년째 되는 해여서 어머님 말씀을 기념으로 써서 걸었던 것이 ‘박근혜 퇴진’이 걷히자 다시 나타난 것이다. 우리는 또 한 번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그러면서 얼른 박근혜를 지우고 이소선 어머니를 떠올렸다. “노동자가 세상의 주인인데, 노동자가 하나로 뭉치면 못할 일이 없지” 하시던, 인자하면서도 당당한 모습이 환하게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것 같았다. 우리 재단은 해마다 전태일 정신을 살리는 구호를 하나씩 정해서 1년 동안 사용하는데, 올해는 ‘박근혜 퇴진’ 싸움 때문에 아직 못 정했다. 이제는 그 빈자리에 얼른 새로 걸어야겠다. 언뜻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전태일의 유언이 떠올랐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건물 외벽 ‘박근혜 퇴진’ 떼어낸 자리에 그 보다 더 크게 써서 걸기로 했다. ‘지난겨울 그 촛불을 헛되이 말라.’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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