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대로 하자” 한국사회의 비극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비상식의 사회]“법대로 하자” 한국사회의 비극

계약과 절차적 합리성을 중시한다는 의미에서 분명히 “법대로 하자”는 근대성의 성취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1987년에 이루어진 형식적인 민주화의 심화·발전을 위해 필요한 숙의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의 자리를 빼앗는 부작용이 있음 또한 분명해졌다.

한국 사회가 얼마나 변화무쌍한지, 몇 주에 한 번 차례가 돌아오는 이 칼럼을 쓰면서 새삼 깨닫게 된다. 명색이 경제학자이니 경제문제와 관련된 비상식적 현상을 날카롭게 해부하는 좋은 글을 쓸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하는 강박, 그 고민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하찮은’ 경제문제 따위는 모조리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은 이슈가 연이어 터지기 때문이다. 이번도 예외가 아니니, 이 글이 지면에 실릴 때면 이미 탄핵심판의 결론은 났을 터이다, 여론조사 결과를 빌려 표현하자면, 80%의 확률로 조기 대선이 확정됐을 것이고, 20% 정도의 확률로는 글쎄 쉽게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 전개되고 있을 것이다.

헌재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광장의 정치

몇 달 동안 정치 포르노처럼 펼쳐진 사태의 시사점이야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이미 많은 사회과학자들이 오래전부터 얘기해 왔던 정치의 사법화 현상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른바 태극기 집회를 주도하는 분들조차도 공공연하게 인정하고 있는 바, 엄청나게 중요한 정치적 사안이 선출직도 아닌 헌법재판관 몇 명의 다수결 판단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사실 그 헌법재판인즉, 냉소적으로 표현하자면 “서울은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있다”는 어이없는 수준의 논거를 대면서 자못 근엄한 표정으로 행정수도 이전 논의를 일거에 무화시키는 판결을 내린 적도 있지 않은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헌법재판소는 헌법을 제멋대로 주무르던 독재자들을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른바 87년 체제의 상징적 제도였다. 1987년의 6월 항쟁이 광장의 정치가 얻어낸 성과였다면, 이제 그 87년 체제가 낡아서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는 상황에서 다시금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수준으로 퍼져간 광장의 정치가 바로 그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역설적 장면을 연출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석연치 않은 근거로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을 내렸던 바로 그 재판관들에게 이번에는 정치적 스펙트럼에서 정반대 쪽에 위치한 최고 권력자의 파면을 결정할 권한을 주고 있는 셈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내 직장인 국립대학교에서도 연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은 규정과 세칙들이 생겨나고 그 틀에 맞춰 행정적으로 상황을 해석하는 것이 일상이 됐다. 불명확한 규정을 악용해 사적 이익을 취하던 이들을 막기 위한 조치로 만들어진 법률과 준칙이 어느 순간에는 머리로 생각하는 능력 자체를 불필요하게 만들어버리고 시스템의 기계적인 관리를 최우선의 과제로 만들어버리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고 보면 시장바닥의 드잡이에서 관용구로 사용되던 “법대로 하자”가 최근 몇 년 새 한국 사회를 설명하는 하나의 키워드처럼 된 듯도 하다. 계약과 절차적 합리성을 중시한다는 의미에서 분명히 이것은 근대성의 성취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1987년에 이루어진 형식적인 민주화의 심화·발전을 위해 필요한 숙의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의 자리를 빼앗는 부작용이 있음 또한 분명해졌다.

통합진보당 해산과 대통령 탄핵이라는, 이 정권 아래서 일어난 중대한 이벤트는 서로 다르면서도 닮은 점이 있다. 그 하나는 좌파·우파나 진보·보수의 겉모습을 갖고 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만도 않다는 점, 다른 하나는 현실적이건 관념적이건 국가안보라는 해묵은 이슈로 연결 짓는 세력이 있다는 점이다. 어쨌거나 이 두 가지 이벤트 모두 아홉 명(혹은 그 미만)에 불과한 법률 전문가의 다수결로 낙착돼버린 것이다.

흔히 대선처럼 전국 단위의 큰 선거 때만 되면 언급되곤 하는 경제학 이론으로 중위투표자 정리라는 것이 있다. 해변에 아이스크림 가게가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서 있고 피서객들이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까지 균등하게 퍼져 있다면, 가운데로 가는 아이스크림 가게가 손님들을 많이 끌어 모으게 마련이고 마침내는 모든 아이스크림 가게들이 가운데로 모여든다는 것이다. 중도 좌에 자리 잡은 아이스크림 가게라면 어차피 왼쪽 끝에 있는 고객들은 이쪽으로 올 수밖에 없으니 한 클릭 오른쪽으로 옮겨감으로써 더 많은 손님을 끌 수 있다.

반지성주의로 귀결되는 역사의 희비극

그런데 애초에 중위투표자 정리가 제대로 성립하려면, 동질적인 척도로 유권자들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줄 세울 수 있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현재 한국의 정당들이, 무엇보다 유권자들이 과연 그런 기준으로 일관되게 줄 서 있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경제는 진보, 안보는 보수’ 등의 구호로 중도를 차지하려는 전략이 자칫 왼쪽에 있는 유권자도 놓치고 오른쪽에 있는 유권자도 놓치는 결과가 되기 쉬운 까닭이기도 하다. 가장 왼쪽에 있다는 통합진보당이 해산됨으로써 한국의 정당정치는 어떤 의미에서는 한 쪽 날개를 잃은 새처럼 돼 버렸거니와, 실상 그때 언필칭 좌우를 가르는 날개도 가장 핵심적인 것은 국가안보라는 추상적인, 게다가 많은 경우 상상 속에 그어진 전선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었다. 그 결과 지나칠 정도로 오른쪽에 위치한 정당이 여전히 다수의 국회의석을 보유한 상태에서 막상 중간지대는 사라져버리고 흔히 말하는 80:20의 대결구도도 진보·보수처럼 서양교과서에 나오는 ‘세련된’ 대립이 아닌 기괴한 모습을 띠고 만 것이 작금의 사정이다.

이른바 불복 프레임이 등장함으로써 “모든 건 법대로 하면 된다”는 논리로 치닫던 경향에 긍정적인 반작용을 가한 것이 아니라, 한편에서는 광장의 정치, 다른 한편에서는 권력의 부패스캔들 앞에서 뜬금없이 성조기까지 들고 나오는 반지성주의로 귀결되는 것은 비극적 내용을 희극적 스타일에 담고 있다는 점에서 글자 그대로 역사의 희비극이다. 그 중에 기본소득에서 한국판 양적 완화에 이르기까지 오랜만에 다양한 메뉴로 차려진 경제 이슈들은 적어도 득표 전략이라는 관점에서는 부차적이고 주변적인 이슈로 전락해버리고 있다. 중도를 지향한다는 후보들이 실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언어로 표를 얻지 못하고 고전하는 동안, 극단적인 가짜 언어로라도 정치적 생명을 부지하려는 ‘생존권 투쟁’의 장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87년 체제의 비극적 귀결이자, 더 거슬러 올라가면 박정희 체제의 사후 복수인 셈이다. 그런 것들이야 이름 붙여 부르기가 업인 사회과학자들에게 맡겨둔다 하더라도,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할 젊은 세대들에게는 이미 현재화하고 있는 미래의 묵시록에 다름아닌 것이다.

<류동민 충남대 교수(경제학)>

비상식의 사회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