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제도 개혁이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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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식의 사회]선거제도 개혁이 출발점이다

한국 사회를 어떻게 다시 객관적 사실에 기초한 합리적인 소통과 상호 신뢰가 가능한 민주적인 사회로 바꾸어놓을 것인가? 첫걸음은 선거제도의 개혁이다. 지금의 소선거구제는 기득권을 재생산하는 정치 시스템이다. 이를 바꾸기 위해서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는 것이 필요하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대통령 탄핵심판을 거치면서 우리 사회는 심각한 대립과 분열로 몸살을 앓고 있다. 특히 가짜뉴스가 돌아다니면서 대중들을 선동하고 있는 상황은 대단히 심각한 징후로 보인다. 가짜뉴스란 허위 사실에 기초해 날조된 뉴스를 말한다. 마치 정식 신문인 것처럼 시위 현장에서 배포되기도 하고, 정치인 혹은 법률 전문가들조차 가짜뉴스에 속아서 공개적인 자리에서 얼토당토않은 주장을 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사실의 날조와 진실의 왜곡은 처음에만 낯설 뿐, 익숙해지면 이내 내면화돼 강력한 믿음으로 바뀐다. 더군다나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과 지속적으로 만나면서 서로의 믿음을 격려하다보면 어느 새 진영논리 혹은 흑백논리에 깊숙이 매몰돼 자신들이 선이고 다른 진영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악한 무리들이 된다.

한국은 지금 지성이 실종되고 미신에 빠져 있어

사실 무근한 선동은 넓은 의미의 미신에 현혹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 군주제와 공화제가 대립하던 시기에 스피노자는 대중들이 자발적으로 군주제라는 예속의 굴레에 들어가는 이유를 미신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봤다. 따라서 대중들이 예속에서 벗어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지성을 사용해 명확한 인과관계, 즉 합리적 질서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스피노자의 진단을 빌리자면, 한국은 지금 지성이 실종되고 미신에 빠져 명확한 인과관계를 파악하지 못한 채 대통령을 마치 군주인 것처럼 생각해 거기에 예속되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태에서는 합리적인 소통이나 대화가 불가능하다. 그저 나와 생각이나 의견이 다른 것뿐인데, 죽여야 한다는 극언을 서슴지 않는다. 특별검사 집 앞에서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며 몽둥이맛을 봐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태극기를 들지 않았다는 이유로 멀쩡히 길을 가던 행인을 구타하는 일도 벌어졌다. 헌재 재판관의 목숨을 위협하겠다는 협박을 SNS에 올린 청년도 있었다. 대한민국은 불신과 증오, 선동과 폭력이 횡행하는 반지성적 무법천지가 된 것이다.

왜 이렇게 됐는가? 우선 87년 체제의 민주화가 철저하게 실패한 것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독재를 끝내는 것에 급급해서 실질적인 민주주의 제도를 정착시키는 일에 소홀했다. 예를 들어 대통령 직선제를 하면서 대통령 결선투표 제도조차도 만들어 놓지 않았다. 정치적 야합에 의해 만들어진 무능한 정부 탓에 찾아온 IMF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적 질서가 한국 사회를 뒤덮으면서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되고 중산층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 결정적으로 지대추구적인(rent-seeking) 정부가 연달아 들어서면서 사회구성원들을 그나마 지탱시켜 주었던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이 모두 무너져버렸다. 세월호, 메르스, 구제역 등이 그 증거다. 오직 소수의 기득권 세력들에게만 유리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절망뿐인 생존경쟁 속에서 기약 없이 목숨을 이어가는 그런 사회가 된 것이다. 국방, 외교, 경제, 의료, 주거, 교육, 방재 등 거의 모든 정책에서 철저하게 무능하면서도 사적 이익 추구에만 몰두하는 그런 정부가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그런데 사회가 줄 수 있는 혜택에서 정작 소외되고 피해를 보면서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는 정부를 오히려 열렬히 옹호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은 참담한 일이다. 조국 근대화의 기치를 내걸고 미신과 구습을 타파했다는 아버지의 유산을 계승하려 했던 딸이 결국에는 미신과 부패가 판치는 세상을 만들어 놓았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우리는 다시 미신을 몰아내고 지성의 활용을 진작해 합리적인 사회 질서를 복원해야 한다. 물론 근대적 합리성이 가진 한계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근대적 합리성의 일방적 거부가 능사는 아니다. 합리성의 한계에 유념하면서도 최대한 자유롭고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다양한 의견들이 왜곡 없이 전달되도록 하며, 구성원들 사이에 우애와 환대가 넘쳐나는 동시에 모든 생명체의 지속가능성이 보장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들이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최소한 객관적 사실이 존중되고 소통돼야 한다. 물론 객관적 사실이라는 것도 사회적으로 구성되긴 하지만, 적어도 동시대의 사회 구성원들과의 자유로운 소통을 통해 가능한 한 객관적이고 투명한 절차를 통해 구성되는 사실이어야만 한다. 만약 이러한 기본적 전제를 거부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사회를 구성할 명분이나 근거를 상실하게 되고, 예속과 폭력이 난무하는 암울한 세계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정당 득표수만큼 의석 배분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

한국 사회를 어떻게 다시 객관적 사실에 기초한 합리적인 소통과 상호 신뢰가 가능한 민주적인 사회로 바꾸어놓을 것인가? 국정을 농단한 대통령을 탄핵하고 야당으로 정권이 교체되면 가능할 것인가?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지성이 실종되고 미신이 판치는 사회를 다시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사회로 만들어놓으려면, 반지성과 미신을 조장하는 기득권의 이해관계를 견제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시스템을 만들 수 있는 첫걸음은 선거제도의 개혁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이 지금의 소선거구제는 한두 개의 지배적인 거대정당이 국회나 지방의회를 장악하고 다양한 집단들(계층, 성별, 연령, 직업 등)의 이해관계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며 기득권을 재생산하는 정치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을 바꾸기 위해서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정당이 득표한 수만큼 의석을 배분하는 제도다. 그래야 특정 집단이 과대 대표되고 다양한 집단들이 과소 대표되는 비정상적 상황을 바로잡을 수 있다. 또 정치인들이 지역과 국가를 위한 정책을 만드는 일에 집중할 수 있다. 정치 시장에 질 좋은 정책상품을 내놓고 소비자들인 시민들로부터 선택을 받는 정치인들이 성공할 수 있고, 특징 있는 정책을 내놓는 소수 정당들의 다양한 목소리가 소외되지 않아야 정치의 종 다양성이 보장될 수 있다. 이런 정치 생태계가 건강하고 지속가능하다. 이런 정치 생태계에서는 특권과 차별이 줄어들고 평범한 대중들의 삶의 질이 좋아질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크다. 객관적 사실과 신념에 기초해서 정책을 만들고 이 정책에 대해 합리적이면서 자유로운 토론이 사회 전반에 퍼져갈 수 있다. 이처럼 자유로운 토론과 참여를 통해 구성원들 간의 연대감이 강화되는 그런 사회가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가 돼야 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런 사회를 만드는 첫 작업은 연동형 비례대표제도로 선거제도를 개혁하는 것이다.

<이상헌 녹색전환연구소장·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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