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평범하지 않은 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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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식의 사회]결코 평범하지 않은 악

지금껏 국민에게 맞서면서 고통을 안겨주고 있는 박 대통령의 모습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분명한 의도를 갖고 있는 특별한 인물로 보였다. 그는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아서, 상상을 초월하는 광경들을 계속 낳고 있다. 그렇기에 그 무거운 죄에 대한 책임을 꼭 물어야 한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을 때 매천 황현은 절명시(絶命詩) 4수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때 매천은 유서에서 선비의 길에 대한 얘기를 남겼다.

“내가 가히 죽어 의(義)를 지켜야 할 까닭은 없으나 국가에서 선비를 키워온 지 오백년에 나라가 망하는 날을 당해 한 사람도 책임을 지고 죽는 사람이 없다. 어찌 가슴 아프지 아니한가. 나는 위로 황천(皇天)에서 받은 올바른 마음씨를 저버린 적이 없고, 아래로는 평생 읽던 좋은 글을 저버리지 아니하려 길이 잠들려 하니 통쾌하지 아니한가. 너희들은 내가 죽는 것을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라.”

매천은 나라를 망하게 만들어 놓고도 자신들을 뉘우칠 줄 모르는 사대부들을 보며 통탄했다. 왕이 통치하던 나라에서 망국의 죄는 당연히 임금과 그 일가가 져야 했지만, 그 책임을 다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선비 매천이 부끄러움을 모르는 그들을 대신해 자결했던 것이다.

망국의 부끄러움을 몰랐던 왕의 일가와 사대부들의 이야기는 오늘로 이어진다. 우리도 나라가 망하기 일보 직전까지 가서 바닥으로 추락했다고 할 지경이 돼버렸다. 민주주의 국가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던 내용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나라를 공황상태에 처하게 만든 지 오래다. 그런데도 그 책임을 져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때 모습 그대로다. 나라를 이 꼴로 만들고도 “완전히 엮인 것”이라고 강변하고 있는 두 사람은 원래부터 그랬다 치자. 박근혜 정부 아래에서 국무위원을 지냈던 장관들은 또 어떠한가.

특검연장 거부는 ‘제2의 반민특위 해체’라 할 수 있어

박근혜 정부 국무위원 중 오늘의 상황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물러난 사람은 없다. 조윤선 전 장관이 구속되고 나서야 도리없이 사표를 냈을 뿐이고,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냈던 문형표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은 구속되고서도 버티다가 여론에 못 이겨 사표를 냈다. 대통령이 말씀하시면 받아적느라 바빠 입 한 번 뻥끗 못했던 장관들은 작금의 사태에 대해서도 한마디 말이 없다.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한술 더 떠 국정 역사교과서 같은 박 대통령의 역주행 정책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촛불민심에도 오불관언(吾不關焉), 자기들이 가던 길만 계속 갈 뿐이다. 참으로 수치심도 모르고 무책임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무책임함에 있어서 그 누구도 황교안 권한대행을 따를 수는 없을 것이다. 황 대행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대해 대통령 다음으로 책임이 무거운 사람이다. 우리 헌법 86조 2항은 국무총리의 역할에 대해 ‘국무총리는 대통령을 보좌하며, 행정에 관하여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각부를 통할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황 대행은 총리로서 대통령을 보좌하는 책임을 다하지 못했고, 국정농단과 블랙리스트 등으로 인한 행정각부의 범죄행위와 난맥을 방치했다. 사실은 국민에게 사죄하고 진작에 물러났어야 할 사람이었다. 그를 권한대행으로 인정해주고 있는 것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국정안정을 바라는 국민의 협조 때문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황 대행은 국민은 아랑곳하지 않고 박 대통령 지켜주기에 발벗고 나섰다. 청와대 압수수색에 대한 특검의 협조 요청을 거부한 데 이어 특검 기간 연장도 거부할 태세다. 황 대행의 거부로 특검 기간 연장이 무산된다면 박 대통령에 대한 구속 수사, 삼성 이외의 다른 대기업들에 대한 수사, 우병우 전 수석에 대한 수사 등이 모두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제2의 반민특위 해체’라는 말이 지나치지 않을 정도의 엄청난 일을 황 대행은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성난 촛불민심 앞에서 항복하는 듯했던 박근혜 정부의 사람들은 다시 막무가내의 버티기로 나서고 있다. 헌법재판소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더욱 기막히다. 탄핵심판정에서 법정모욕 행위를 계속하고 있는 대통령의 변호인단은 아예 “탄핵심판을 결정하면 촛불집회와 태극기 집회가 정면충돌해 서울 아스팔트길 전부가 피와 눈물로 덮일 것”이라며 폭력행동을 선동하는 발언까지 일삼고 있다.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능력이 없었던 아이히만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했던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의회가 탄핵 표결에 들어가려 하자 스스로 물러났다. 그때 특히 문제가 되었던 것은 도청사건을 덮으려 했던 거짓말이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의 죄는 그에 비할 바가 아니다. 더구나 자신의 죄를 은폐하기 위해 거짓말을 수없이 반복해 왔다. 진작에 스스로 사퇴했어도 용서가 되기 어려운 경우이다. 그런데도 청와대를 은신처로 삼은 듯이 끝까지 버티면서 범죄를 은폐하고 대통령 자리를 지키는 데만 골몰하고 있다. 그 한 사람으로 인해 나라는 국정공백과 혼돈의 엄청난 비용을 치르고 있다. 일신의 안전을 위해 온 국민에게 이 같은 고통을 안겨주고 있는 죄는 이제까지 지었던 어떤 죄보다도 무거울 것이다.

유대인 학살의 주범 아돌프 아이히만은 예루살렘의 법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유대인을 죽이는 일에 나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나는 유대인이나 비유대인을 결코 죽인 적이 없다. 이 문제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어떠한 인간도 죽인 적이 없다. 나는 유대인이든 비유대인이든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 여하튼 난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 그는 한 번도 반성하지 않았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그의 말은 언제나 동일했고, 똑같은 단어로 표현됐다고 기록했다. 아이히만이 말하는 데 그렇게 무능력했던 것은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능력의 부재에 기인한다고 아렌트는 설명했다. 그런 점만 보면 우리가 박 대통령을 바라보며 갖는 생각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아렌트는 아이히만에 대해 범죄의 의도를 미리 갖고 있지 않았고 어떤 특별한 인물도 아니었다며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 표현했다. 하지만 지금껏 국민에게 맞서면서 고통을 안겨주고 있는 박 대통령의 모습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분명한 의도를 갖고 있는 특별한 인물로 보였다. 그는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아서, 상상을 초월하는 광경들을 계속 낳고 있다. 그렇기에 그 무거운 죄에 대한 책임을 꼭 물어야 한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정의가 불의를 심판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박근혜가 탄핵당해 청와대를 나오게 되면 곧 바로 구속돼 감옥으로 가야 하는 이유이다. 그래야 나라가 산다.

<유창선 시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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