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가상현실(VR) 시장에 중요한 변수가 발생했다. 가상현실 플랫폼의 개척자인 오큘러스가 제니맥스(ZeniMax Media)와의 소송에서 패했기 때문이다. 오큘러스는 2014년 페이스북이 23억 달러에 인수한 후 자회사로 편입한 상태인데, 게임 개발사 제니맥스는 페이스북과 오큘러스 임직원들이 코드 도용 및 계약 위반을 했다며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재판 내용의 핵심은 유명 게임 개발자이자 오큘러스의 CTO(최고 기술 책임자) 존 카맥이 이전 직장인 제니맥스에서 개발했던 코드를 오큘러스 제품 개발에 사용했다는 내용이었다. 페이스북의 CEO 마크 저커버그는 평소와 달리 넥타이에 정장 차림으로 재판에 참석해 치열하게 공방을 벌였으나, 결국 배심원단은 제니맥스에 5억 달러를 배상하라고 평결했다.
2012년 오큘러스의 창업자 럭키 팔머는 저렴하고 괜찮은 성능의 가상현실 헤드셋을 킥스타터에 공개했다. 오큘러스가 대중적인 가상현실 헤드셋을 공개하기 전까지 가상현실 시장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오큘러스는 전 세계적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유명 게임 개발자들의 찬사가 이어지는 분위기에서 존 카맥도 합류하게 된다.

HTC의 가상현실 기기 바이브 / HTC
존 카맥은 전설적인 게임 ‘둠(Doom)’의 개발자로, 2010년 게임 개발자 콘퍼런스에서 평생 공로상을 수상했으며 2013년부터 오큘러스에서 CTO로 일했다. 하지만 이번 재판 결과로 인해 럭키 팔머, 존 카맥, 마크 저커버그 모두 망신을 당하게 됐다. 물론 이들의 항소 여부와 소송의 완전한 종결 시까지 최종 결론은 유보할 필요가 있겠지만, 제니맥스가 재판에서 이긴 후 오큘러스 제품의 판매금지 가처분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힌 상태여서 오큘러스의 사업에 먹구름이 낀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더군다나 오큘러스는 이번 재판 결과가 아니더라도, 현재 가상현실 시장에서 제대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판매량에 있어서 강력한 경쟁 상대인 HTC 바이브뿐만 아니라 나중에 출시된 구글 데이드림, 소니 플레이스테이션VR 등 여러 경쟁 제품에 밀리고 있다. 또한 2016년 3월 제품 출시와 함께 베스트바이 매장 500여곳에 체험공간을 마련했는데, 최근 이용이 저조한 200여곳을 폐쇄하기로 한 상태다.
오큘러스는 가장 앞서 가상현실 플랫폼을 대중에게 선보였고, 페이스북의 인수로 인해 든든한 자금까지 갖춘 상태이고, 소비자 제품 출시 전에 가장 탄탄한 개발자 생태계를 확보한 것으로 평가받았던 업체다. 오큘러스는 왜 그런 강력한 이점들에도 불구하고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걸까?
무엇보다 오큘러스가 기존에 약속한 가격보다 훨씬 비싼 가격으로 소비자 제품을 출시한 걸 꼽을 수 있다. 물론 경쟁제품인 HTC 바이브도 오큘러스와 비슷한 수준의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다. 문제는 약속이다. 오큘러스는 출시 전에 350달러의 가격을 약속했지만 실제로는 599달러에 제품을 출시했다(전용 컨트롤러까지 더하면 798달러다). 이에 대해 소비자와 개발자들은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다. 이와 더불어 제품 출시의 지연, 킬러앱의 부족, 페이스북에 대한 불신, 오큘러스 임직원에 대한 실망 등이 겹쳐 많은 개발자들이 오큘러스 플랫폼을 떠났다.
최근 오큘러스가 처한 상황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제공한다. 그것은 소비자 및 개발자와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하며, 커다란 자금을 확보했다고 해서 벤처 정신을 잃어서는 안 되며, 법적인 문제를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류한석 류한석기술문화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