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최인훈 소설에 등장하는 ‘빗소리’는 자기 삶의 일그러지고 바스라진 기억의 무늬를 쓰다듬는, 무념인 듯하면서도 실은 자기 삶을 천천히 복기하는, 그런 생각의 골짜기에 흐르는 음악인 것이다.
무슨 일로 오랜만에 최인훈의 <광장>을 읽다가 흥미로운 부분을 만났다. <광장>하면 분단문학, 지식인 문학, 고도의 사유가 응축된 문학으로 이미 학계를 넘어 고등학생 필독서에 수능 단골 출제 지문으로 된 책이려니와 나로서도 두세 번은 정독하고 열댓 번은 훑어본 책이지만, 역시 조건과 상황과 시간이 달라지면 또 다르게 읽혀지는 것이 명작이요 고전이 아닌가 한다.
이번에 흥미를 느낀 부분은 소설의 앞부분, 주인공 이명준의 대학시절 풍경이다. 예전에는 전쟁 시기의 극심한 이념 혼란 및 남과 북, 그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었던 지식인 이명준에 관심이 갔는데, 이번에 다시 살펴보면서 철학과 3학년생 이명준이 전쟁 직전의 남한 서울에서 겪는 사소한 에피소드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국 사회의 천박한 스노비즘이랄까, 뿌리 없는 중산층 문화랄까, 텅 비어 공허한 상태에서 그럴싸한 문화적 요소를 억지로 채워넣는 과잉된 교양문화랄까, 그런 헛헛함과 비루함과 천박함에 대하여 소설 앞부분이 날카롭게 묘사하고 있었다.
‘댄스 파티, 드라이브, 피크닉, 영화, 또 댄스 파티’, 요즘도 흔하지 않은 화려한, 그러나 공허하고도 천박한 그런 문화가 그 시절에 전쟁 전의 남한 서울에 있었는데, 이명준이 보기에 그렇게 살아가는 ‘영미한테는 아마 삶이란 재미면 그만인 모양’이었다. 영미는 ‘미군 지프 꽁무니에 올라앉아서 미국의 유치원 아이보다 못한 영어로 재롱을 부리는’ 여자이며 ‘자동차 이름과 카메라 이야기와 미국에는 높은 집이 많다는 소리밖에 할 줄 모르는’ 무리에 속해 있다. ‘영미의 오빠 태식은 음악을 배우는 학생이면서 카바레에서 색소폰’을 부는데, 그래도 ‘이들 오뉘에게 한 가지 좋은 데가 있다면, 부르주아의 집안 아이들이 흔히 갖는 덕-너그러움’이다.

전북 익산~군산 구간 철로 / 정윤수
최인훈은 왜 소설에서 빗소리를 되풀이할까
<광장>의 이명준은 ‘영미의 남녀 친구들이 방에서 들락날락’하는 파티에 참석한다. ‘흰 이브닝 드레스에, 어린 플라타너스 줄기처럼, 미끈하면서 보오얀 팔’을 가진 영미가 춤을 추자고, 술을 마시자고, 이야기를 하자고 이명준에게 다가온다. 그녀를 따라 가보니 ‘넓은 방에는 긴 의자를 벽에다 밀어붙이고, 푸른 전등빛 아래서 쌍쌍이 춤을 추고 있다. 블루스.’
이런 풍경 속에서 이명준은 스스로 미끄러지고 이탈한다. ‘문가에 놓인 긴 의자에 가 앉으면서 담배를 꺼낸다. 담배 맛이 씁쓸하기만 하다. 몸을 훨씬 눕히고 눈을 감는다. 눈을 감는 버릇을 가지라, 신에 가까워지리라.’ 철학과 학생다운 포즈에 영미는 더 다가오는데, 그럴수록 이명준은 다른 생각의 골짜기로 후퇴한다.
이런 이야기, 즉 습관적으로 사유하는 자가 화려한 밤의 세계 혹은 과잉된 교양문화가 장식물처럼 넘쳐흐르는 곳에 어쩌다가 발을 디뎠다가 스스로 놀라서 뒤로 물러서는 이야기는 이 <광장> 말고도, 이를테면 오정희의 <야회>나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거쳐 편혜영이나 박민규까지 이어지는데, 아마도 한국 사회의 중산층 욕망과 이에 편승하지 못하거나 그런 흐름에 심미적으로 부대끼는 풍경은 하나의 문화사적 줄기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번에 그런 점을 읽게 된 것이다.
아무튼, 비릿한 냄새가 풍기는 야회에서 물러난 이명준은 다른 세계, 다른 공간, 다른 사유의 골짜기에 빠져든다. 여기서 작가 최인훈이 <광장>이나 <회색인>이나 <화두> 같은 소설에서 되풀이하여 묘사하고 변주하는 비 내리는 소리가 묘사된다.
‘몇 시나 됐을까, 그 생각이 더 꼬리를 이을 사이 없이, 철철철 빗물받이를 타고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잠에서 깬 귀에 큰물처럼 부풀려져 밀려든다. 바그르 좌, 바그르, 세차게 퍼붓는 그 소리는 씩씩한 숨결에 넘친 소리다. 고개를 들어 머리맡에 있을 탁상시계를 더듬어 본다. 야광이 아닌 그 오래된 기계는 자리조차 가늠할 수 없다.’
최인훈은 이렇게 자신의 작품에서 자주 비 내리는 소리, 양철 지붕에서 빗물받이를 타고 흘러내리는 빗소리를 묘사해 왔는데, 그 빗소리는 기억의 골짜기를 환하게 밝혀주면서 주인공의 유년기를 대번에 환기시켜준다.
백색 소음(white noise)이라는 말이 있다. 음향공학의 설명을 따르면 주파수에 관계없이 일정한 연속 스펙트럼을 가진 소리로, 소정의 주파수 범위 내에서 1옥타브당 포함되는 성분의 세기가 주파수 위치에 관계없이 들려오는 일정한 잡음을 뜻한다. 기차 소리, 빗소리, 카페에서 사람들이 수런거리는 소리, 라디오 잡음 소리 등이 그렇다. 전문가들은 백색 소음이 집중력을 47.7% 정도 향상시키고 기억력도 9.6% 정도 향상시킨다고 말한다. 스트레스도 27.1%나 감소시키며 학습시간을 13.63% 단축시켜서 그 효율성을 높인다고도 한다.
나는, 믿는다. 이 주장을. 왜냐하면 지난주에 짧은 구간이나마 열차를 타게 되었는데, 마침 핸드폰도 배터리가 부족한 참이었고 책도 노트도 들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팔짱을 끼고 고개를 숙인 채 무료하게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어느 순간 레일을 스치는 기차의 둔중한 소리를 듣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곧장 작업실에 와서 기차 소리를 검색하였더니, 유튜브는 미 대륙 횡단열차나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포함하여 전 세계의 기차 소리를 최대 10시간 이상씩 들려주었으며, 좀 더 검색을 해보았더니 비가 쏟아지는 경복궁 근정전이나 덕수궁 석조전의 풍경과 소리, 한옥집 대청마루에서 녹화한 빗소리와 그 소슬한 풍경을 볼 수 있었다. 과연 집중력이 높아졌다. 내가 원래 해야만 하는 일 대신에 바로 그 풍경과 소리들에 몇 시간씩 집중한 것이 문제라면 문제일 뿐.
유년기에 들었던 빗물 떨어지는 소리 묘사
내가 지난주에 들은 ‘음악’은 바로 그 소리들이었다. 그래서 최인훈의 <광장>을 다시 읽은 것이다. 최인훈은 여러 소설들에서 주인공이 고민에 빠질 때마다 유년기에 들었던 빗물 떨어지는 소리를 자주 묘사했기 때문이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은 좀처럼 섞이기 싫은 야회를 끝내고 나서 자기 방으로 와서는 유년기의 기억에 파묻히게 되는데, 그 순간 역시 그 골짜기에는 다음처럼 빗소리가 들려온다.
‘텅 빈 머릿속을 메우기나 하려는 것처럼, 빗소리가 한결 모질게 들리기 시작한다. 그 소리는 귀를 거쳐 온몸으로 흘러간다. 돌돌돌 귓가에서 거품져 흘러들어, 머릿속으로, 목으로, 가슴으로, 배, 발끝까지 빠르게, 그러면서 가닥가닥까지 스며든다.’
이렇게 되면, 이런 묘사는 ‘백색 소음’을 넘어서 한 인간의 생애에 드리워진 심미적 기억의 풍경으로 이어진다. 201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부분 당선작은 이다희 시인의 ‘백색 소음’이다. 시인 이시영과 최정례는 심사평에서 ‘모호한 관념어나 철학적 냄새를 풍기는’ 작품들이나 ‘현재 생활과는 동떨어진 시골 전경이나 자연을 낭만적으로’ 그린 시들을 물리치고 이다희 시인의 출품작을 선택하면서 ‘침착한 시선으로 대상을 바라보며 생각을 펼쳐내고 있는 작품’이라고 상찬했다. ‘백색 소음’은 이렇게 시작한다.
조용히 눈을 떠요. 눈을 뜰 때에는 조용히 뜹니다. 눈꺼풀이 하는 일은 소란스럽지 않아요. 물건들이 어렴풋한 덩어리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눈길로 오래 더듬으면 덩어리에 날이 생기죠. 나는 물건들과의 이러한 친교에 순응하는 편입니다.
다시 심사평을 인용하건대 ‘우리가 담겨 있는 이 세계 속에서 나와 사물의 의미를 진지하게 탐구하는 자세’야말로 모든 예술, 아니 모든 생활세계의 태도가 아닐까. 최인훈의 주인공들이 수시로 유년기의 빗소리를 따라 기억의 골짜기를 헤매는 것 또한 그러한 바, 진정한 백색 소음은 그 무슨 집중력을 높여 학습이나 업무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의 일그러지고 바스라진 기억의 무늬를 쓰다듬는, 무념인 듯하면서도 실은 자기 삶을 천천히 복기하는, 그런 생각의 골짜기에 흐르는 음악인 것이다.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