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 그 끝에는 무엇이 남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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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문화에서 보은과 복수는 매우 중요한 테마 중 하나다. 역사서를 비롯해 민담과 설화, 무협소설에 이르기까지 은혜를 갚기 위해 죽음을 불사하는 의인이나 목숨을 걸고 원수를 응징하는 인물들을 빈번하게 만날 수 있다. 기군상의 원작을 고선웅이 각색, 연출한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역시 이러한 중국식 은원(恩怨) 사상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춘추시대 진나라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조씨고아>는 전체 공연의 절반 이상을 ‘조씨고아’가 살아남게 된 과정에 할애하고 있다. 도안고가 조씨 일가를 멸족시키는 피의 광풍 한가운데, 이 집안의 유일한 핏줄을 살리기 위한 많은 이들의 희생이 연이어 펼쳐진다. 한궐 장군, 공손저구, 정영의 친아들, 그리고 정영의 아내 등 수많은 인물들이 은혜를 갚거나 정의를 위해, 혹은 어쩔 수 없이 목숨을 버린다. 그리고 무대에 남은 것은 얼떨결에 이 수많은 희생의 무게를 짊어지게 된 촌부 정영과 그 희생의 대가인 ‘조씨고아’뿐이다.

/국립극단

/국립극단

극의 후반부는 자연히 그 많은 희생을 딛고 살아남은 조씨고아의 각성과 복수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일찍이 <조씨고아>는 서양에 ‘동양의 햄릿’으로 알려졌는데, 죽은 아버지의 원한을 갚는 아들의 복수가 주된 스토리라는 점에서 충분히 수긍이 간다. 특히 2막의 시작, 장성한 조씨고아를 앉혀두고 정영이 그간의 사연을 소상히 들려주며 복수를 다짐시키는 부분은 <햄릿>의 첫 장면과 매우 비슷하다. 물론 여기서 진실을 폭로하고 복수를 종용하는 것은 죽은 아버지의 유령이 아니라 키워준 아버지 정영이지만, 무대 위에서 ‘유령’처럼 얼굴에 흰 분칠을 한 정영이 켜켜이 쌓아온 한을 풀어내는 장면은 이러한 <햄릿>의 모티브를 더욱 생생하게 환기시킨다.

한편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의 초점은 조씨고아가 아니라 그를 맡아 키워낸 정영에게 맞춰져 있다. 그러면서 ‘복수’가 갖는 복잡 미묘한 의미를 무대 위에 펼쳐낸다. 정영은 얼떨결에 ‘조씨고아’를 떠안게 된 평범한 촌부다. 하지만 그 아이를 위해 차례차례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의인들의 죽음을 목도하고 그 희생의 무게를 짊어지면서, 결국은 가족을 버리면서까지 필사적으로 이 아이를 살리게 된다. 그 과정에 친아들과 아내마저 죽어버린 그에게 이제 남은 것은 조씨고아를 키워서 그 수많은 이들의 원한을 갚는 것뿐이다.

원수 도안고 밑에서 정영은 오로지 복수의 날을 기다리며 수십 년을 살았다. 그리고 마침내 장성한 조씨고아에게 그간의 사연을 들려주며 복수를 종용한다. 결국 조씨고아는 정영의 말에 감복해 도안고에게 칼을 겨눔으로써 복수를 완성한다. 도안고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조씨고아는 조씨 가문을 복권시켰으며, 정영 역시 후한 포상을 받는다. 권선징악적 관점으로 보면 명백한 선의 승리이자 해피엔딩이다. 그러나 여기서 연극은 정색을 하고 다시 질문을 던진다. 분명 복수는 성공했지만, 과연 그 끝에는 무엇이 남았는가라고.

도안고의 가문 역시 몰살할 것이냐고 묻는 정영의 목소리에는 착잡함이 서려 있다. 그토록 오랜 세월 기다려온 복수였으나, 그 끝에 남은 것은 공허함과 또 다른 피를 불렀다는 자괴감뿐이다.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난 뒤, 빈 무대에 남은 나비 하나와 ‘장자’를 연상시키는 시 구절은 공허함을 증폭시키며 작품의 테마를 다시 한 번 강조한다. 극적인 밀도가 뛰어난 만큼 마지막의 여운도 깊게 남는 작품이다. 1월 18일부터 2월 12일까지, 명동예술극장.

<김주연 연극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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